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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28.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49.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⑥하숙집 이사와 하숙방 짐 옮기기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하숙집 이사와 하숙방 짐 옮기기      


#하숙생들이 이사 가는 이유

 하숙생들은 하숙집을 자주 옮겨 다녔다. 1년 이상 한집에 머무르기도 했으나, 대개는 학기마다 또는 1년마다 이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숙생들이 자주 이사 가는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하숙생의 입장이다. 어느 하숙집을 선택하더라도 내 집처럼 편하지 않고 남남끼리 어울려야 하는 공동체 생활의 피로도가 적지 않은 바에야 지금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의 입장이다. 주인아주머니로서는 우선 일고여덟 명의 혈기 왕성한 하숙생들을 혼자 상대하다 보니 일일이 세심한 정을 쏟기가 어려워 틀에 박힌 응대에 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사정은 아무래도 제 식구와는 다른 정서적 이질감이 원인이 돼 하숙을 치르는 과정에서 하숙생들이 서운해할 만한 일이 어쩔 수 없이 자주 불거진다는 점이다.      


마지막 하나도 하숙생의 입장으로 고등학교 선후배나 동기, 동향(同鄕)의 친구와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하고픈 정서적 유대감이 그 이유였다. 굳이 순위를 꼽는다면 고등학교 친구가 1순위, 고등학교 선후배가 2순위, 동향의 친구가 3순위쯤 되겠으나 어디까지나 내 경험에 비춘 자리매김이다.      


그런데 친한 고등학교 친구와 한방을 사용하는 데에는 의외의 변수가 발생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방에서 몇 달씩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의견충돌을 피할 수 없어 뜻밖으로 우정에 상처를 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이다. 믿고 의지하는 친한 사이이기에 서로에 대한 실망감도 커서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하숙생들이 절친과는 한방에서 지내는 옵션을 선택하지 않는 대신, 한 하숙집의 서로 다른 방에서 생활하기를 선호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숙방 이삿짐 나르기

 80년대 초 대학가 하숙생들이 하숙방 짐을 옮기는 방식은 흥미로웠다. 하숙생들의 이삿짐은 단출한 편이었다. 책상과 의자, 책, 접어서 갤 수 있는 천으로 된 옷장, 이불, 옷가지 따위였는데 드물게 앉은뱅이책상을 사용하거나 탁자를 책상으로 삼는 하숙생들도 있었다.      


*택시와 용달차

책상과 의자가 없는 하숙생들은 길가는 택시를 세워 이삿짐을 날랐다. 이사 갈 동네가 거기서 거기라 기본요금 안팎의 요금이 미터기에 찍혔다. 80년대 초 포니 택시의 기본요금은 600원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있는 하숙생들은 바퀴가 세 개 달린 미니 용달차를 호출해 이용했다. 나도 용달차를 한 번 부른 적이 있었는데 운임(運賃)으로 오천 원인가를 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낡은 중고 책상을 버리고 이사한 뒤 새 책상을 살 요량으로 택시를 타고 짐을 옮긴 일도 있었다. 책이 좀 많은 편이어서 책을 포장한 종이상자가 대여섯 개 정도 됐는데 고맙게도 친구가 이삿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택시 트렁크에 짐을 꽉 채우고 뒷자리에는 이불 보따리와 옷가지 보따리를 밀어서 욱여넣고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친구는 조수석, 나는 뒷자리에 앉았는데 앉았다기보다 이불 보따리를 껴안고 껴서 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흔쾌히 이사를 거들어 준 친구는 훗날 목사가 돼 미국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전해 들었다.      


신림동 하숙촌에서는 손수레를 빌려 하숙집에서 하숙집으로 짐을 옮기는 풍경도 흔했다.     


*시내버스

 좀 별난 경험을 한 적도 있었다. 경제학과에 재학 중이던 동향(同鄕)의 친구가 결혼한 누나 집에서 하숙집으로 이사할 때의 일이었다. 그 친구의 누나 집은 강남, 하숙집은 신촌이라 택시에 짐을 실을 줄 알았는데 버스를 타고 가자는 것이었다.      


책 몇 권과 이불 보따리, 옷가지를 담은 큰 가방이 전부였으나 승객들로 북적이는 버스에 실어 나르기에는 이불 보따리의 덩치가 만만찮았다. 끝까지 버스 편을 고집한 친구의 뜻이 워낙 완강해 결국 양손에 짐을 들고 둘이 버스에 올랐다.      


낑낑대면서 이불 보따리를 겨우 끌어 올려 버스에 탔는데 예상대로 빈자리가 없었다. 천만다행히 운전석 옆 엔진룸이 눈에 띄었다. 엔진룸은 요즘 버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물로 운전석 오른편으로 널찍하게 돌출한 사각형 형태의 쇠붙이 덩어리였다. 복잡한 버스 안에서 걸터앉거나 무거운 물건을 내려놓을 수도 있어 승객들에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우리는 얼른 엔진룸 위에 이불 보따리를 얹고 나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지금은 없어진 141번 버스였다.     


*화물트럭

 이런 일도 있었다. 대학 4학년 2학기 종강 후 하숙집 짐을 대구 고향 집으로 부치기 위해 화물차를 불렀다. 택배 회사가 없던 시절이라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삿짐을 옮기기 위해서는 화물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중전화 부스가 곳곳에 널려 있을 때라 부스 안에 비치된 전화번호부에 화물차 광고가 여럿 실려 있었다. 4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는 짐보따리라 종이상자만 열 개가 넘었다.     


화물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하숙집 앞 큰 골목길에 바리바리 싼 이삿짐을 내다 놓고 기다리는데 바퀴가 열 개 달린 5톤 대형 트럭이 나타났다. 트럭 짐칸에는 이미 전국 각지로 실어 나를 포장 상자와 가구류 따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짐을 다 싣고 트럭 기사에게 운송비를 현금으로 계산하자 트럭이 떠났다. 하숙 짐은 이틀 후 고향 집에 도착했다.


 군 복무 후 입사(入社)하면서 결혼하기 전까지 두 군데에서 4년 가까이 마지막 하숙 생활을 했다. 그때가 33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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