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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20.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45.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③사투리 집합소, 하숙집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사투리 집합소, 하숙집      


#아따, 거시기 허네, 거시기,

 대학 2학년 1학기 개강 며칠 후, 후문 근처 주택가의 하숙집 학생들끼리 자축파티를 열었다. 막 시작된 신학기에 즈음해 친목을 도모하고 새로 들어온 하숙생들을 축하하기 위한 환영의 뜻을 더한 자리였다. 나처럼 하숙집 입주(入住) 신입도 있었고, 새내기 대학생도 있었고 몇 학기째 하숙집 밥을 먹고 있는 선임(先任) 입주생도 있었다.     


제일 넓은 방에 모여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소주와 맥주, 안줏거리를 펼쳐 놓고 있던 차에 하숙집 왕고참(王古參) 선배가 마지막으로 합석하면서 불쑥 던진 전라도 사투리는 강렬하면서 흡인력이 있었다. ‘아따, 거시기 허네 거시기, 해’.     


거시기, 라는 3음절 단어를 처음 들어본 내가 말뜻을 알아챌 리 없었고 다른 하숙생들은 알고서 그러는지 모르고도 아는 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들 웃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고 동료들을 따라서 웃기만 한 나는 이내 그 말이 ‘푸짐하네, 푸짐해. 보기 좋네’, 라는 뜻인 것을 알게 됐다. 물리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왕고참선배의 고향은 빛고을 광주(光州)였다.      


#만사형통(萬事亨通)의 단어, 거시기

 왕고참선배는 툭하면 거시기, 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고 우리도 장난삼아 그 말을 따라 했다. 왕고참선배는 우리에게 거시기, 라는 단어는 전라도의 상징적인 사투리로 그 속에 여러 용법(用法)이 담겨 있어 요술 방망이나 다름없는 말이라고 알려주었다.      


왕고참선배처럼 전라도 출신들도 호남 사투리로만 알던, 거시기가 표준말이라는 사실은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거시기는 국립국어원 발행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된 표준말이다. 품사가 무려 네 갈래로 정의는 이렇다.     


#거시기의 사전적 정의와 어원

 첫째,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인칭 대명사로도 쓰이고 지시 대명사로도 쓰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네 혹시 거시기(인물) 아닌가. 아야 거시기(물건) 좀 줘 보랑께.     


둘째, 하려는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가 거북할 때 쓰는 군소리. 감탄사로 사용되는 경우다. 실례지만 좀 비켜주십시오, 할 때의 쩌기, 거시기(excuse) 쪼까 비키쇼잉.      


셋째, 말하는 중에 표현하려는 형용사가 얼른 생각이 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할 때, 그 대신으로 쓰는 말. 오늘은 날씨가 거시기하니까(흐리니까, 비 오니까, 오니까, 추우니까, 더우니까) 내일 가자.      


넷째, 말하는 중에 표현하려는 동사가 얼른 생각이 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할 때, 그 대신으로 쓰는 말. 서둘러 거시기하자는데(가자는데) 왜 이리 굼뜨냐?     


 거시기의 어원(語源)은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난처하다는 뜻의 전라도 방언(方言)인 동사 ‘거석 하다’에 접미사 ‘이’가 따라붙어 체언(體言)의 형태가 명사 거시기로 변형됐다는 설이 있다. 변형설을 전제로 한다면 남도(南道) 말로 사용되다가 북쪽으로 확산하면서 표준어로 정착한 사례로 유추할 수 있겠다.     


#마법의 낱말, 거시기

 말할 때 거시기는 신비한 위력을 발휘하는 만사형통의 단어고 용례(用例)가 무궁무진한 만능 낱말이었다. 특히 말하기 곤란하거나 생각이 막힐 때, 감탄 또는 탄식의 의미로 사용되는 형용사적 표현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많다, 적다, 좋다, 나쁘다, 기쁘다, 슬프다, 우습다, 달다, 쓰다, 예쁘다, 못생겼다, 빠르다, 느리다, 거북하다, 곤란하다, 날씨가 뻑적지근하다, 몸이 노곤하다, 굉장하다, 놀랍다, 시끌벅적하다 등 어떤 상황에서도 끌어다 쓸 수 있고 온갖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녔다.     


 단정적이고 구체적으로 적시해서 말하지 않았는데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알아듣는 신통방통한 단어고 애매하고 막연하고 모호하게 말해도 의사가 소통되는 마법의 낱말이 아닐 수 없었다.      


#기억나는 사투리

 왕고참선배한테 배운 전라도 사투리 중 기억나는 것으로는 욕봤다(고생했다), 우짜쓰까이(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메 징한거(징그럽다), 그라제(그렇지), 환장해 불것다(환장해 버리겠다), 싸게 싸게 오드라고(빨리빨리 오너라) 따위가 있다.      


 거시기는 요즘도 내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 말할 때마다 단어에 깃든 천(千)의 얼굴에 감탄하게 되고 왕고참선배가 생각난다. 욕봤다, 도 아주 유용한 말로 내가 애용하는 낱말이다.     


#싸우는 것처럼 들리는 경상도 말투

 대구 토박이인 내가 억수로, (굉장히)라는 말을 하면 다들 눈만 껌벅거렸고 천지 삐까리, (아주 많다)라는 말에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데팠다, (데웠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했고 밥을 먹다가 짜드라, (그다지, 많이)라는 말이 나오면 반찬이 짜냐고 되물었다.     


한 번은 경상도 출신 하숙집 후배와 한창 대화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인아주머니가 올라와 학생들 왜 싸워, 라고 뜯어말리는 시늉을 했다. 목청이 높고 악센트가 억세고 강한 경상도 말투의 본래적(本來的) 특성에서 비롯된 웃지 못할 일이라 말하던 우리나, 말을 듣던 상대방 모두 껄껄 웃고 말았다.     


#우리말의 보고(寶庫), 사투리

 대학 졸업 때까지 하숙집 네 군데를 옮겨 다녔는데 그때마다 전라도 친구도 사귀었고 충청도 친구도 사귀었고 강원도와 제주도 친구도 사귀었다. 덕분에 지방 사투리를 제법 알게 됐지만 제주도 말만큼은 알아듣기도 힘들었고 배우기는 더 힘들었다.     


전라도 사투리도 전라남도 말이 다르고 전라북도 말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전라도 친구들도 경상도 사투리에서 똑같이 느꼈다고 하니, 사투리야말로 변화무쌍한 생명력을 지닌 우리말의 보고(寶庫)가 아닐까, 싶다.     


충청도 친구들은 듣던 대로 말투가 느렸으나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짐작도 할 수 없게끔 말이 빠르고 성격도 불같은 친구도 있었고 행동이 날랜 친구도 있었다. 강원도 말은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말투와 비슷했다.     


 80년대 초, 대학가 하숙촌은 사투리 집합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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