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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06.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38. 철학 개론 강의와 원칙주의의 함정

철학 개론 강의와 원칙주의의 함정     


#노고산 언덕의 춘풍

 노고산 언덕의 춘풍(春風)은 심술궂었다. 1981년 3월의 봄바람은 사나웠다. 캠퍼스 정문을 넘어서자마자 오른쪽 옆으로 보이는 등(藤) 나무 정자를 지나면서 시작되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갈 때 밀어닥친 맞바람이 얼굴을 따갑게 할퀴었다.


바람은 언덕 위에서 매섭게 밀고 내려왔고 맞서 내딛는 발걸음은 후들거렸다. 사나운 기세의 바람을 타고 회오리처럼 무질서하게 자유비행을 하는 티끌을 피하느라 눈을 내리깔아야 했고 어깨는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3월 바람의 고약한 성미는 한결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40여 년 전 이맘때, 노고산을 오르내리는 내내 옷깃을 여미게 한 까탈스러운 봄기운은 양력 4월 춘삼월(春三月)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화사한 계절다웠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이른 봄의 캠퍼스는 분주했다. 동아리마다 새내기 회원 유치를 위한 홍보 활동에 여념이 없었고 신입생들은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설렌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교양과목과 철학 개론

 신입생들의 교육과정은 교양과목 위주로 편성됐다.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거나 그럴 수 없는 과목으로 구분됐는데 전자가 교양 선택이고 후자는 교양 필수였다. 교양과목은 영어 회화와 역사, 철학, 심리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카테고리의 학문이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철학 개론 수업이었다.     


순전히 주관적인 취향의 문제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으나 철학 개론 강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학생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째 학생들이 그럴 것이라고 믿어온 철학 개론에 대한 고정 관념의 빗장을 열었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속성을 내재한 학문도 접근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흥미롭고 친근한 생활 속의 삶의 지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둘째 담당 교수의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말투,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묘한 흡인력이 있어 학생들의 수업 주목도가 높았다는 점이다.      


 철학 개론 첫 수업 때 교수는 자신의 미국 미시간대 유학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기억나는 대로 내용을 재구성하면 이랬다.     


40여 년 전의 추억을 소환하는 사진 한 장.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친구는 요즘도 자주 만나는 술친구다.


#미시간 주 고속도로 사례

박사과정 시절이었다. 미시간 주(洲)로 빠져나가는 고속도로 편도 3차선에서 진풍경이 펼쳐졌다. 8기통 엔진을 장착한 ●차 3대가 나란히 법정 제한속도인 시속 60km를 고수하며 일렬횡대로 차선을 점령한 채 주행하고 있었다.


뒤따르던 차들은 1, 2, 3차선이 모두 가로막혀 추월할 수 없었고 다급해진 운전자들은 신경질적으로 경적(警笛) 소리를 울려댔다. 도로는 일대 난리가 났고 급기야 고속도로 순찰차까지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은 배설물의 한 음절 된소리로 낡고 오래돼 너덜너덜한 승용차를 빗댄 표현이었다. ●차 운전자들은 비현실적인 고속도로 제한속도가 차량 정체를 불러와 지각하는 직장인들이 속출하고 과속 단속에 적발되는 차량이 늘어난다는 내용의 민원을 당국에 제기한 바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합법적인 항의의 표시로 출근 시간대 준법 운행을 감행한 것이었다.     


●차 운전자들이 준법 운행을 시도한 날, 미시간 주로 진입하는 요금소를 앞두고 심각한 고속도로 정체 현상이 벌어졌으나 도로교통법을 준수한 그들을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 질서 유지를 위한 준법정신의 실천이 오히려 도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역설을 초래한 이날의 사태는 화제가 됐고 교통 당국은 결국 법정 제한속도를 상향 조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원칙주의의 함정

 제한속도를 상향 조정한 이후 정체 현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도로 사정을 반영하지 않은 법정 제한속도가 차량의 원활한 소통을 가로막게끔 하향 설정됐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현실 상황을 외면한 정책적 판단은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일깨운 일화였다.     


교수는 미시간주 고속도로 사례를 원칙주의의 함정이라고 지칭했다. 사회적 규범이 실제 현실과 충돌해 규범적 가치 실현의 효용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실례를 상정한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은 의외로 적지 않다. 미시간주 고속도로 사례처럼 원칙과 규칙이 오랫동안 사실로 통용된 사회적 관행에 반하거나 필요 이상의 과도한 제재로 공익적 가치를 상실하는 경우가 그렇다.      


 철학 개론 수업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제 사례 중심으로 진행돼 이해도가 높았고 학생들의 반응도 괜찮았다. 형이상학적이고 낯선 용어투성이라 주목도가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수업 참여율이 높았던 것도 사례 중심 강의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절대선(絶對善), 선험론(先驗論), 자아(自我), 슈퍼에고(超自我) 따위의 철학 용어를 배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행정편의주의, 현실과 괴리된 정책 결정, 현장 의견을 무시한 탁상행정의 사례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고의 체력을 기르는 데에 도움이 됐다. 수강한 교양과목 중 강의 내용 일부를 아직도 기억하는 유일한 과목이기도 하다.     


#모교 출신의 동문 선배 교수

 철학 개론 강의를 담당한 교수는 모교 출신의 동문 선배였다. 도수가 높은 검은 뿔테 안경이 투박한 외모와 잘 어울렸다.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 스타일의 교수는 말투가 느릿느릿하면서 약간 어눌했고 말속에 뼈가 있는 풍자적 표현에 능했다. 말투만큼이나 행동거지도 빠르지 않았고 우스갯소리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도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어가는 교수를 보고서 학생들은 또 키득거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강의를 풀어나가는 교수법이 자연스럽고 능청스러운 데에 따른 반응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저 사람은 말은 잘하는데 기억에 남는 말이 별로 없어요, 라거나 나도 그 책을 읽긴 읽었지만 왜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하는 식이었다.     


 스토리텔링 식 강의라 학생들이 좋아한 그 교수도 어느새 여든을 훌쩍 넘겼다. 각종 강연과 집필 등으로 현역 못지않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老) 교수의 건승(健勝)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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