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권 Feb 28.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36. 첫 객지 생활

첫 객지 생활     


#10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     

 서울은 크고 넓었다. 대학 입시 전형을 위해 밟은 서울 땅은 시끄럽고 복잡했다. 1981년 1월 하순, 서울역 광장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뤄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도로는 자동차와 버스의 물결로 바다를 이뤘다. 처음 가본 광화문과 종로, 명동 일대의 밤거리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눈부시게 빛났고, 그곳은 이제껏 내가 알던 도시의 풍경이 아니었다. 도시의 다운 타운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서울에 와보고서야 알았다. 서울의 낮은 분주했고 밤은 화려하면서 뜨거웠다.      


서울의 크기는 눈으로 가름할 수 없었고 차량과 사람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10년 전, 1971년의 서울에 설레었고 10년 후 서울의 모습에 얼이 나갔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대구와 달랐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71년은 내가 서울 풍경을 처음 본 해다.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출신 동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번 주말에 대구 고향 집에 내려간다고 했더니 그는 대뜸, 시골 가니? 라고, 태연하게 대꾸해 어이없어한 적이 있었다. 대구가 우리나라 3대 도시인데 왜 시골이라고 하냐니까 응, 서울 말고는 다 시골 아니니? 시골 맞잖아, 라고, 되물어 할 말을 잃었었다.      


#시골과 농촌의 차이

 서울에서는 서울 외 모든 지방의 도시를 시골이라고 통칭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대구 사람들에게 시골은 농사짓는 농촌을 뜻하나, 서울 사람들에게 시골은 지방 출신들의 고향을 의미할 뿐, 농촌은 그냥 농촌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사전적 정의도 이와 다르지 않아 잠시나마 서울 친구에게 서운해 한 감정을 거둘 수 있었으나 찜찜한 마음까지는 털어낼 수 없었다.     


#용마루 고개 맨 위의 적산 가옥

 대학 입학과 함께 첫 객지 생활이 시작됐다. 오래전 결혼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사촌 누나 집이 나의 거주지였다. 큰아버지의 첫째 딸인 사촌 누나 집은 용산구 용마루 고개 언덕배기 맨 위의 적산(敵産) 가옥이었다. 광복 이전 일본인이 살았던 사촌 누나 집은 단층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 3개에 화장실과 부엌이 딸려 있었다.


가옥의 구조도 익숙한 우리 양식과 달랐다. 대문을 열면 폭이 좁고 기다란 정원이 있었고 그곳에 심어진 꽃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정원 끝 담벼락을 끼고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좁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공간이 이어졌는데 놓인 물건들로 보아 창고나 다용도실로 사용되는 듯했다.     


화장실에는 수세식 변기와 욕조, 온수가 나오는 급탕(給湯)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화장실 내부 벽에 밀착된 직사각형 시멘트 구조물 삼면(三面)을 타일로 두른 욕조는 욕조라기보다 몸을 씻거나 생활용수로 사용할 물을 받아두는 물탱크처럼 보였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길옆으로 화물열차가 다니는 철길이 있었다. 마포구 연남동 가좌역에서 용산구 효창동을 거쳐 원효로까지 이어지는 옛 경의선(용산선) 폐철길이다. 2011년부터 서울시가 시행한 도시재생 프로젝트 공사에 들어가 2016년 최종 완공된 지금의 경의선 숲길로 탈바꿈했다.     


#141번 시내버스

 용마루 고개를 넘어 공덕 오거리를 지나고 동도중학교를 거쳐 직진하면 학교가 나왔다. 용마루 고개 오르막 정거장에서 지금은 사라진 141번 시내버스를 타고 등교하고 귀가했다. 내가 탈 때쯤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종점인 141번 버스는 고속버스 터미널을 경유하는 노선이라 대구를 오갈 때 많이 이용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일부러 학교에서 사촌 누나 집까지 걸어서 가보기도 했는데 40분가량 걸렸던 것 같다.      


 1981년 여름 어느 날 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PARK IN KWON


#느리면서 빨랐던 객지 생활

 객지 생활은 느리면서도 빠르게 흘러갔다. 사촌 누나 집에서의 시간은 더딘 듯 더디지 않았고, 새내기 대학생의 캠퍼스 일상은 분주하게 지나갔다.


아무래도 사촌 누나와 사촌 매형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고, 두 남자 조카와 한집에서 지내다 보니 여기저기서 불편한 점도 터져 나왔다. 생활 습관이 달라 행동반경에 제약이 따랐고 내 집과는 다른 환경이라 귀가 후 시간의 흐름이 내 마음을 쫓아가지 못했고 내 마음도 시간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했다.     


대학교 생활은 심술궂은 봄바람을 끌어안고 시작됐다. 수강 과목을 무엇으로 할 것이지, 강의 출석을 하든지 말든지, 과제 리포트를 쓰든지 말든지, 공강(空講)일 때 도서관에 가든지 노닥거리든지, 휴강일 때 무엇을 할 것인지, 점심을 누구와 먹을 것인지, 강의 끝나고 술자리 약속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따위를 모두 스스로 알아서 챙기고 결정해야 했다.


둘러싼 환경이 이전과는 180도 다른 캠퍼스 생활과 고등학교 동창 모임, 단체 미팅, 소개팅 등 대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들뜬 일정에 하루하루가 빠른 속도로 오늘을 뒤로 밀어냈다. 내 마음의 시간이 현실의 시간보다 훨씬 빨랐다.      


#늦은 귀가 시간

 내가 귀가하는 인기척에 사촌 누나와 사촌 매형, 조카들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고 그들의 시간도 나와 마찬가지로 삐그덕거리며 느리게 지나갔을 것이다. 나의 늦은 귀가 시간은 그들의 하루 체감 시간을 더욱더 아득하게 했을 것이다.


밤잠이 많은 사촌 누나는 내가 밤늦게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일일이 대문을 열어주는 수고로 잠을 설쳤을 것이고 사촌 매형과 조카들도 초인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뒤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을 것이다.      


#사촌 누나가 내건 조건

 사촌 누나는 나보다 18살 위라 누나라기보다 막내 이모나 막내 고모에 어울렸다. 나를 받아들이기 전, 사촌 누나는 조건 하나를 내걸었다. 5살 아래인 중2 조카의 공부를 봐주는 조건이었다. 조카는 엉덩이에 뚝심이 없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고 그나마 딴짓에 정신이 빠지곤 했다.      


귀가 시간이 차츰 늦어지면서 조카의 공부를 챙기지 못한 날이 늘어났고 사촌 누나의 조바심도 늘어났다. 밥값은 할 요량으로 마음을 다잡고 닦달을 해봤으나 조카의 부실한 엉덩이 뚝심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하루에 한 개씩 한 달 동안 영어 단어 30개를 외우라는 숙제를 내줬다. 한 달이 지났을 때 화가 났지만, 화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 사촌 누나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름방학이 되기 직전 사촌 누나 집에서 나왔다. 짐보따리라고는 책 몇 권이 다였다.      

이전 07화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