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4. 골키퍼(中)
축구 4. 골키퍼(中)
#열한 번째 필드플레이어
현대 축구에서 골키퍼의 역할은 중요하다. 골키퍼는 경기장 안에서 유일하게 손을 사용할 수 있는 포지션이다. 골문을 지킨다고 해서 문지기 또는 수문장(守門將)으로도 불린다. 슛을 막는 선수라는 의미의 슛 스토퍼(shot stopper)라는 용어도 골키퍼를 지칭한다. 골문을 지키는 최후의 수비수로서 상대 선수의 슛을 막아내는 방어 임무뿐 아니라 최후방에서 손이나 킥으로 짧은 패스나 빠르고 긴 패스를 효과적으로 구사해 빌드업의 1차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속공(速攻)을 진두지휘하는 열한 번째 필드플레이어로 정의된다.
적극적인 클리어링과 태클로 수비수들의 뒷공간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스위퍼 키퍼(sweep keeper)의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자기 팀과 상대 팀 선수들의 움직임을 내다보면서 공격과 수비에 필요한 주문을 끊임없이 전달하고 독려한다. 해외 무대에 진출한 골키퍼에게 언어 소통력이 필수적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1993년 IFFHS(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가 선정한 최우수골키퍼 3위에 오른 호르헤 캄포스. ⓒAutor desconocido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호르헤 캄포스
골키퍼는 일단 키가 커야 한다. 골대 높이가 2.44m라 키가 크면 클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문전(門前)을 향해 날아온 공중볼을 다이빙 캐치하거나 쳐낼 때, 또는 상대 공격수와 경합할 때도 골키퍼의 큰 키는 장점일 수밖에 없다. 골키퍼의 신체 조건에서 큰 키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다. 축구 마니아라면 다 아는 예외적인 골키퍼도 있다. 14년간 멕시코 국가대표(1991~2004)를 지내며 세 차례 월드컵에 출전한 호르헤 캄포스(1966~)가 그 주인공이다.
캄포스의 키는 불과 168cm. 축구 선수로서도 단신(短身)인 그는 골키퍼로서는 치명적인 신체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최상위 국가대표팀 간 경기인 A매치 129경기를 포함해 통산 574경기에서 놀라운 퍼포먼스를 발휘하며 서른여덟 살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다. 특히 캄포스는 94 미국 월드컵에 이어 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멕시코를 16강으로 이끌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한국은 캄포스가 골문을 지킨 멕시코에 1-3으로 역전패를 당했다.
멕시코전 패배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네덜란드에 0-5 참패를 당한 한국 대표팀은 결국 조별리그 도중 감독이 전격 경질되며 월드컵 출전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 콧수염을 기른 거스 히딩크(1946~)였다. 캄포스는 대륙별 챔피언 여섯 개 팀과 월드컵 우승, 준우승 팀이 대결하는 199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멕시코가 브라질을 꺾고 정상에 오를 때에도 골문을 지켰다.
캄포스는 작은 키의 열세를 극복할 방편으로 민첩성과 대담성을 앞세운 과감하고도 공격적인 전진 수비를 선택했다. 특히 페널티 박스 외곽으로까지 넓힌 캄포스의 방어 범위는 상대 공격수들의 문전 돌파와 슈팅 기회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데에 효과적이었다. 키에 비해 점프 능력이 뛰어났고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는 플레이를 자주 구사했다.
남다른 예측 능력으로 승부차기 방어에도 뛰어났다. 팬들에게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한 그의 플레이를 벤치에서는 오금을 저리며 지켜봤을 것이다. 놀랍게도 멕시코 국내 무대에 데뷔한 1988년에는 시즌 도중 득점왕을 다퉜다고도 하니, 캄포스의 공격 본능은 타고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골키퍼로서는 아주 드문,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골키퍼의 다이빙 캐치 장면. ⓒMaster Sgt. Lance Cheung of U.S. Air Force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슈퍼 세이브
골키퍼의 플레이는 슈퍼 세이브를 기록했을 때 가장 빛난다. 골문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골이나 다름없는 슈팅을 주먹이나 손바닥, 손가락 끝으로 쳐내거나 상대 공격수와 1대 1로 맞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손과 발, 몸을 덮쳐 실점을 막아낼 때가 그렇다. 슈퍼 세이브는 순전히 골키퍼의 개인적 방어 능력이다. 슈퍼 세이브는 비길 경기에서 이기고, 질 경기에서 비길 수 있게 하는 골키퍼만의 힘이다. 엇비슷한 전력의 팀끼리 붙었을 때 골키퍼의 슈퍼 세이브는 팀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 변수가 된다. 골키퍼의 슈퍼 세이브는 공격수의 골과 동일한 값어치가 있다.
슈퍼 세이브를 조금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 슈퍼 세이브는 실점 위기에서 골키퍼의 선방(善防)이 전제된 것이라 수비벽이 뚫렸거나 허술했다는 증거다.
#승부차기
골키퍼가 팀의 운명을 좌우할 때가 있다. 승부차기에서 양 팀의 골키퍼는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골키퍼의 활약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것이다. 선방(善防)한 골키퍼는 승리의 일등 공신이, 그렇지 못한 골키퍼는 졸지에 패배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다. 지금은 은퇴한 국가대표 골키퍼 이운재(1973~)의 이름이 전 국민에게 각인된 결정적인 계기도 2002 한일 월드컵 준준결승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였다.
이운재는 스페인의 네 번째 키커 호아킨 산체스의 머뭇거리는 움직임에서 킥의 방향을 정확히 읽고 막아내 월드컵 4강 진출의 영웅이 됐다. 만약 호아킨 산체스가 킥을 성공시키고 한국이 4강 진출에 실패했다면 이운재의 축구 인생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스페인 골키퍼 카시야스(1981~)에게는 그날의 승부차기가 두 번 다시 기억하기 싫은 쓰라린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승부차기는 잔인하다. 카시야스는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스페인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며 골든 글러브(최우수골키퍼)를 차지해 2002년의 악몽을 떨쳤다.
골키퍼 장갑. ⓒYülli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클린 시트(무실점 방어 경기)
골키퍼가 발휘할 수 있는 최상의 플레이는 무실점 방어다. 단 한 골의 실점도 허용하지 않고 경기를 끝내는 것은 모든 골키퍼의 소망일 것이다. 축구 용어로 클린 시트(Clean Sheet)라 부르는 무실점 방어는 슈퍼 세이브와 함께 골키퍼의 능력을 판단하는 지표다. 슈퍼 세이브가 오롯이 골키퍼의 개인 능력에 달려 있다면 클린 시트는 동료 수비수들의 협력과 희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골키퍼 혼자만의 힘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는 점에서 클린 시트는 팀 전체 수비력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골키퍼의 판단력과 방어력, 수비진의 선제적 공격 차단, 골키퍼와 수비수들의 적극적인 의사소통, 효율적인 협력 수비 등이 하나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클린 시트야말로 골키퍼 개인에게나 팀에게나 가장 바람직한 최상의 결과일 것이다.
클린 시트는 실점 내용을 기록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종이가 백지처럼 깨끗하다는 데서 유래된 용어라고 한다. 0:0도 이론적으로는 클린 시트나 승리한 팀도, 진 팀도 없는 무승부 경기라 현실적인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골키퍼가 지키는 골대는 높이가 2.44m, 너비는 7.32m다.
골키퍼는 또 단숨에 경기 흐름을 뒤바꿀 수도 있다. 공수 전환 시 상대 팀이 수비 대열을 갖추기 전, 골키퍼의 영리하고 재빠른 판단에 따른 기습적인 전진 패스는 속공의 유효한 수단이 된다. 상대 수비수보다 자기편 공격수가 많은 상황에서 펼쳐지는 속공이야말로 득점 가능성이 높은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특히 골키퍼가 유리한 공간을 점유한 자기편 공격수에게 한 손으로 길게 던져주는 종(從)패스는 정확성과 함께 최단 시간 내에 빌드업을 가능하게 해 전술적 가치가 높다.
구소련 출신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1929~1990)은 이미 1950~60년대에 그런 패스를 선보였다. 인터넷에 떠도는 희귀한 흑백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의 클리어링에도 능한 야신의 플레이는 폭넓은 수비 범위와 공격 가담 능력을 갖춰야 하는 스위퍼 키퍼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