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존중은 너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또는 반대로 과하게 공동체 주의적인 것이 아닐까 싶을 수도 있다. 이런 혼란으로 인해 우리는 좋은 사람을 고를 때 늘 고민한다.
"나는 각자의 생활을 이해하는 게 좋던데... 아 아니다. 그래도 나를 1순위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이 딜레마의 해답은 결국 올바른 '존중'이다. 1순위로 생각한다고 각자의 생활을 이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1순위가 아니어도 집착 수준의 연락 빈도가 존재할 수 있다. 존중의 방법을 성숙하고 올바르게 터득한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줄 줄 안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겠지만은 이해와 방치, 관심과 구속의 경계를 넘지 않게 조심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존중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하게 개인주의 적이거나 공동체주의적인 성격 양상을 '연락의 빈도'로 기준을 삼곤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기준을 연락의 빈도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 현대에 있어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 든 간에 상대방을 궁금해하는 정도와 양이 될 것이다. 과거 핸드폰이 없는 시절에는 가끔 주고받는 편지와 전화 한 두통으로도 연애 감정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단순하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으니까 연락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위기감을 느낄 수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만큼 대단한 믿음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가능 했다. 현재는 아니다. 그만한 믿음이 없어도 실시간으로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에 관계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할 수 있다. 믿음은 보지 않고도 생기는 신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지 보고 믿는 것은 단지 증거를 확인한 것일 뿐이다.
연락의 빈도는 신뢰에 의해서만 결정이 되어야 한다. 내 시간을 존중받기 바라기 전 상대방에게 불안하지 않을 정도의 신뢰를 보여주어야 하고,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연락의 빈도를 욕하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방의 상황과 마음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했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이 쌍방으로 이루어질 때 연락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쌍방 존중이 충족되었을 때 드러나는 상대방의 욕구와 결핍 그리고 불만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상형을 고를 때 <신뢰를 주는 사람>, <연락 잘 되는 사람>, <나를 믿어주는 사람>, <내 시간을 존중하는 사람> 같은 조건들은 다소 피상적이므로 고려 사항에서 제외해야 한다. 이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찾다 보면 편향적으로 판단하게 되어 예상치 못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전에 방치되었던 연애로 인해 연락의 빈도가 잦은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았으나 그런 사람을 정작 만나고 보니 내 시간들을 확보하고 싶은 욕구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것이다. 이전에 연락이 잘 안 되던 사람은 연애 감정에 좀 더 몰두하고자 하는 나를 존중하지 않은 것이고, 현재 연락이 너무 잘 되어서 문제인 사람은 본인의 조급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은 것이다. 즉,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기보다는 조금 더 상위 문제인 '존중'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과연 연락 문제뿐일까? 아니다. 매우 다양한 문제에 적용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주의 vs. 공동체 주의적인 이성을 골라내면 안 된다. 둘 다 가능한 사람을 골라보자. 그리고 본인이 먼저 가능 해져보자. 그것이 우선이고 시작이다. 그리고 나면 더 잘 구분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존중"을 잘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 해보자. 연락을 잘 하는 사람에 대한 구분은 과연 '빈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