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로'와 '동정'의 차이를 생각해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필자는 위로와 동정의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던 적이 있었다. 그것의 핵심 요소는 바로 '존중'이었다.
존중이 들어있는 위로는 위로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존중이 빠져버린 위로는 동정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절망적인 일을 경험했을 때 사람은 일차적으로 그 상황의 객관적인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 일을 '자신'에게 대입하여 보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나오는 감정은 '공감'이다. 그런데 그 공감을 상대방을 기준으로 사용하면 어떻게 되며 본인을 기준으로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보자. 전자의 경우 내가 공감하는 정도와 별개로 상대방의 감정의 정도를 함부로 추측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내가 공감하는 만큼 상대방의 아픔을 제한한다. 이러한 절차에 의해서 "야 내가 너보다 더 힘든 일 겪어봤어.", "이런 어려움은 너만 겪는 거 아냐." 식의 위로 방법이 극도로 혐오받는 이유가 된다. 저 말들은 차라리 부정적인 어투가 묻어있기라도 하지 동정의 경우 참 구분하기 어렵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상대방의 아픔을 내가 지레짐작하고 그것을 내가 이미 다 아는 것이라고 착각할 때 심지어 실제로 더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태도를 가진 채로 건네는 위로 자체는 거의 동정의 형태가 될 것이다. "불쌍하다"라는 말도 그러한 태도로부터 나왔으니 말이다. 따라서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감정에 대해서 또는 그 이외의 생각이나 사상에 대해서 부정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할 경우 그것에 대해 불쾌함이 생기게 된다. 자신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반항이다.
대부분 이별, 이혼의 원인은 '성격차이'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서로는 존재 자체가 '다름'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차이를 인정하자 존중하자고 하면서 우리의 삶 곳곳에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옳다고 생각한 것에 의해 존중이 얼마나 무너지고 있는지 말이다. 삶의 대부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종교 및 정치적 사상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두 사람의 관계가 위험한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상대를 존중해야만 하는 관계이지만 자신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생각, 행위들을 남이 아닌 자신과 결합하는 대상이 사고하거나 행하고 있을 때 그것을 존중하게 되면 반대로 자기 파괴적인 존중이 되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대한 차이점이다. 그것 또한 존중의 형태는 당연히 가능 하지만 다양한 딜레마가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조금 더 '존중'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