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사랑이 정말 좋다는 말 크게 공감해. 너의 편지를 읽고 우리 민서가 서우처럼 두 살 더 많아지면 엄마를 덜 찾겠지 하고 가졌던 막연한 기대에 금이 갔어. 늘 생각했었어. 아이들이 클수록 자신만의 세계도 커지겠지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를 덜 찾는 건 아니겠구나 하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어. 어릴 때는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끊임없이 부르잖아. 아기 때는 울고 말문이 트이면 엄마를 연신 외쳐대. 우리는 다 아는 거지만 아이들에게 새로운 게 보이거나 느껴지면 꼭 그걸 알려주려고 애를 써. 필요한 게 있어도 엄마를 부르지. 그렇다 보니 엄마들은 늘 호출에 대기하는 상태로 하루를 보내. 이런 부름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만 같으면서도 사랑으로 알고 품으려 노력하는 너의 엄마 다움이 참 위대하게 느껴져.
네가 말했듯이 엄마가 되어도 주변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는 느낌은 언제나 행복하게 여겨지잖아. 나도 그 부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왜 그럴까? 받을 만큼 충분히 사랑을 받은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마음속 깊이 주변으로부터 여전히 나를 좀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관심과 돌봄을 갈구하고 있는 이 죽일 놈의 욕망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고 말이야. 오늘날 이 나이에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연대감인 것 같아. 살면서 어떤 대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우리의 들숨 날숨 호흡과 함께 살아있는 것 같아.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서 예술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연대감. 그걸 꼭 확인하고 싶어 사람들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통각으로 남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인간이 잘할 수 있는 형태로 남기는 거지. 그래서 네가 예전에 얘기했던, 어느 한 출판사의 편집자님이 ‘누구나 예술가이다.’라는 잠재성을 논한 그 이야기에 참 호감이 가. 그 말 한마디에 골몰히 빠져 있다가 인간의 예술이 전해지고 전승되면서 유산이라는 게 만들어지는 것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야. 너와 그림책을 공부하며 가장 전율이 느껴지는 부분이 뭔지 아니? 우리가 상상하는 예술이라는 실체가 일상과 전혀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야. 일상 속에 예술이 있다는 진실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 너와 함께한 나날들이 있었다는 게 모처럼 감사하게 느껴져. 그런 기회가 나에게 찾아온 게 큰 행운이 아니면 무엇이겠니.
그런데 너무 감격한 나머지 최근에 내가 좀 실수를 했어. 강준이가 올해 초등학생이 되고 방과 후 일정을 만들어야 하는데 내 감격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일념에 취해버린 거야. 시간표 퍼즐 맞추기를 다 완성하고 나서 남편하고 다시 보는데 그건 일정표가 아니었어. 내가 온갖 예체능 수업을 다 갖다 붙여 놓았더라. 마블에서 스파이더맨이 튀어나와 손목 거미줄을 슉슉 날리면서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해도 될까 말까 한 일과였던 거야. 마스크까지 쓰고 다녀야 하는데 하마터면 아들 잡을 뻔했지 뭐니. 너무 예술만 쫓아다니다 보니 현실성이 떨어지는 현실을 보게 된 거지. 멘털 붕괴. 정말 휘청댔어.
한편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아들에게 가장 큰 게 남을까 하는 고민이 시작된 것도 이때였어. 초1인데 유아기 시절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흐른 경험이 있으니까 금세 초3, 초4 시기가 올 것만 같은 쫓기는 기분에 휩싸여버린 거야. 이제 시작인데 내 머릿속에 아들을 이미 중고등 학생으로 그려 놓고선, 무엇을 잘하면 좋을지 인형 놀이 아닌 인형 놀이에 빠져 허상에 사로잡힌 순간도 있었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데 매너도 훌륭한 그런 소년, 그런 청년을 마구 상상했지 뭐야. 솔직히 그런 욕심을 내가? 정말 내가? 하고 있다니. 스스로에게 참 당황스럽기도 하더라. 이 당혹감은 번뇌로 이어졌고 며칠 밤 정말 머리 몇십 가닥이 새하얘질 정도로 몸부림친 것 같아. 내 뇌에 빨간 불이 탁 켜지며 ‘별아, 가치 판단해야 된다. 네가 부모로서 결정한 교육의 방향성이 우리 아들 평생에 걸쳐 다음다음 선택에 영향을 주게 될 테니 말이야.’라고 깜빡깜빡 경고하며 난리를 쳤어. 어떻게 키울까에 따라 아이들의 방과 후 일과 내용이 달라지니 처음으로 학부모로서의 역량에 도전을 받는 느낌까지 들었어. 혹시 나만 이렇게 비장한 걸까 하는 생각도 스치듯 지나갔지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너무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라. 하루하루 평범하게 흐르는 유소년 시절이 쌓이고 쌓여 성인을 만드는 것임을 나는 너무 처절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거든! 내 유년 시절을 돌아보았을 때 아쉬운 부분을 아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았어. 매일 경험하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유익한 자양분이 되는지 또는 유해한 독소가 되는지 나는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더 치밀하게 파고들었던 것 같아.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새벽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된 그림책을 만났어. [파란막대 파란상자] 를 읽고 나는 내 질문을 다시 고쳤어. ‘무엇이 우리 아들에게 가장 크게 남을까?’가 아니라 ‘아들과 무엇으로 이어지고 싶은가?’로 말이야. 우리 가족의 아름다운 사랑을 고이 보존하고 살아남게 하기 위해 이 아이의 하루는 무엇으로 채워지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꾼 거야.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놓으니 남편과도 대화가 풀리기 시작했어. 남편은 최우선으로 영어와 암산을 꼭 가르치고 싶어 했어. 본인의 언어가 영어이기도 하고, 코로나가 풀리면 본인 친구 가족들을 만나기도 할 테니 우리 아이들이 영어를 잘하게 되면 더 좋은 추억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을 테야. 나를 만나기 전에는 두 가지 언어를 수월하게 하는 것의 장점을 크게 인지하지 못했대. 그런데 나와 함께 살면서 두 가지 언어를 하는 조건이 한정된 시간 내에 공유하고 품을 수 있는 사고가 훨씬 더 확장된다는 점과 그런 면에서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는 거야. 그리고 더 대화를 깊게 나누다 보니 남편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실 자식의 생존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어.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이미 세상은 무한 경쟁 사회이고 전 세계인의 주요 소통 도구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다양한 사람들과 좀 더 유연하고 수월하게 소통할 수 있어야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다 판단한 것 같아. 거창하게 말하자면 소통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마치 우리가 인성을 길러주는 것처럼 기본으로 갖추게 해주고 싶다는 아빠의 간절한 마음이구나 하고 나는 해석을 했어. 이해가 되자 바로 검색을 하기 시작했어. 영어 자체만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영어로 듣고 말하되 내용은 자연과학, 미술과 공예, 그리고 토론 발표 등등 다양한 주제와 소통 형태를 다루는 학원을 찾아보았어. 고군분투 끝에 우리는 아주 아주 단순한 일과표를 만들어 냈어. 아이 스스로도 머릿속에 한눈에 그려지는 일과가 될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매일매일 지루하지 않게.
참 웃긴 것 같아. 누군가는 그럴지 몰라. 무슨 영어 학원 하나 보내는데 저렇게 많은 생각이 필요하냐고 말이야. 그래 맞아. 나는 누군가의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어. 같은 결론이 아닌 것은 너무 당연해. 한 가정 한 가정마다 그 가족만의 생태가 모두 다 다를 텐데 어떻게 같은 결말이겠어. 하지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바라보는 태도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을 것 같아. 어른들이 이만큼 아이의 발달과 성장을 온전한 삶의 한 과정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은 적극 권하고 싶어.
이렇게 새로운 질문으로 얻은 결과물을 보니 엄마인 나의 마음에도 깊은 안도감이 찾아들더라. 나에겐 이 과정이 꼭 필요했던 것 같아. 신기한 느낌이었어. 엄마로서의 나의 불안감을 살살 달래 주었거든. 그러면서도 오전 시간이나마 작가로 활동하고 싶은 몇 가지 일에 이젠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겠는 걸 하는 설렘도 살포시 찾아들더라니까.
너에게 쓰는 편지를 먼저 마치고, 그림책 [파란막대 파란상자]에 대한 감상문을 브런치에 남길 생각을 하고 있어. ‘사람은 무엇으로 이어 질까. 좋은 유산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상속은 얼마나 먼 세대까지 가게 될 까. 하는 것을 주제로 생각을 풀어보고 싶어.’ 그리고 상속과 사랑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런 점도 생각해보고 싶어. 정말 훌륭한 유산은 세대 간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양한 형태로 남는 것이고 그게 가능한 이유는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우리 아이들이 지금은 엄마인 우리와 가까이 있지만 크면 클수록 그런 신체적 거리적 물리성은 사라지게 될 거야. 그렇더라도 엄마와 우리 아이들을 이어주는 정신은 더 강해질 거라 믿어. 지금 네가 주는 자양분을 아이들은 잘 흡수해서 너에게 더 커진 사랑으로 화답하는 날이 꼭 올 거야. 혹시 그게 왕복이 아닌 편도라고 느껴지더라도 [파란막대 파란상자]처럼 민우와 서우의 대를 물리고 물려 지혜롭게 이어지고 있다면 엄마 김나윤의 위대한 성공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너무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응원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