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관계를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너의 편지를 읽으며 많은 생각이 오가는 밤이야.
나윤이 네가 딸과 함께 연결되었던 그 순간 내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하나 더 알게 되어 얼마나 반갑고 기뻤니. 그래, 나 자신이 누군가와 공명할 때 우리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는 것은 인생에 정말 큰 희열을 주는 것 같아. 그러고 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점점 더 빠져 들게 되기도 하고, 그렇게 점점 나의 세계도 더 넓어지게 되겠지.
네가 딸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느새 나도 우리 딸을 떠올려. 두 돌 전까지만 해도 ‘딸기 아몬드’라고 부르던 우리 둘째 말이야. 세 돌이 지나면서부터 사랑스러운 이 별명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 같아. 그 자리를 차지한 깜찍함 한 판 끔찍함 두 판, 그 사이를 오가는 감정이 널뛰기를 하곤 해.
푸닥거리가 다 끝난 뒤 먼지만 털털 날리는 듯한 기분이 들 때 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어. 왜냐면 가끔은 내 감정 뒤에 우리 딸이 보일 때가 있거든. 우리 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면 그때가 바로 내가 어설픈 훈육을 저지르고 난 뒤야.
그제야 나는 두려워져. 우리 딸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상상을 하면 정신이 아찔해. 사람이 실수를 하면 대게 덮고 싶잖아. 그런데 이미 아이에게 가버린 원망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휩싸여 있을 때 만난 게 있어.
연이와 버들 도령 | 백희나 | 책읽는곰
그림책, 백희나 작가의 [연이와 버들 도령]. 그 이야기 속엔 연이라는 어린 여자애와 나이 든 여인 그리고 버들 도령이 살고 있어. 어린 여자애 연이는 나이 든 여인과 버들 도령 두 존재 만나 아주 상반되는 일을 겪어. 이 책을 홀로 다섯 번 낭독했을 때 나는 내 안에 무언가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어.
엄마로서 존재하는 내 마음 안에 나이 든 여인과 버들 도령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거야. 아이가 즐거울 때는 나는 버들 도령이 되어 우리 딸을 만나.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고, 따뜻하고 맛난 한 상차림의 밥을 지어주고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구해주고 싶지. 너도 알 거야. 아이의 욕구와 필요를 알아채는 나 자신이 때로 얼마나 대견하게 느껴지는지. 그것들을 채워주는 엄마의 일상이 얼마나 벅찬 자긍심을 안겨 주는지. 그런데 말이야. 어느새 아이가 생떼를 부리기 시작하면 내 몸속 어딘가에 떡 하니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나이 든 여인이 벌떡 일어나게 돼. 어느 순간부터는 나름의 타당한 논리도 다 팽개치고 아이와 무슨 전면 승부를 걸고 있는 유치한 내가 보여.
한 펼침 면에서 발견한 이 이야기의 한 문구가 옆통수를 날렸어. 정신 차려야겠구나 하고 나를 살린 그 장면은 이랬어. 그림은 텅 비어 있고, 아주 외롭고 쓸쓸한 결말을 맞은 나이 든 여인의 최후가 통첩되어 있는 거야. 그 최후의 통첩을 확인했을 때 내가 마주했던 두려움의 실체가 겹쳐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어. 두 번째 옆통수를 이어받았는데 그건 바로 연이와 버들 도령의 관계였어. 버들 도령에게서 받은 상냥한 친절과 넉넉한 베풂으로 어느덧 한 뼘 자란 연이가 받은 것들 중 가장 귀한 것을 버들 도령에게 되돌려 주는 날이 오거든.
아, 진정한 사랑은 은혜를 아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 말이야. 그게 성숙한 사랑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바로 내가 우리 딸에게 주어야 할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생떼가 났다면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잘 안된 자신이 힘들어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신호를 보낸 걸 텐데. 그 진실을 망각하는 순간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몰라 엉뚱한 내 고집을 건네며 이걸 잡으라고 요구하는 성숙하지 못한 사랑을 나는 이제 더 버리고, 그 대신 언제라도 대체 이 아이는 무엇을 해내고 싶었나 하는 그 의지에 관심을 더 쏟아야 할 때인 것 같아.
마침, 네가 해보자고 한 아동 인권에 대한 토론 말이야. 아동 인권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면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문장을 읽고 머리로만 한 이해를 뛰어넘는 좀 더 적극적인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공부하고 탐구하면 변화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진심으로 아이들이 신뢰하는 엄마가 되고 싶구나.
연이와 버들 도령의 관계는 영원해. 일부러도 아니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렇게 돼. 결국 연이에게 의미 있는 존재는 나이 든 여인이 아니라 버들 도령이었던 거야. 아이든 어른이든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람은 버들 도령이야. 상냥함. 친절. 넉넉함. 베풂. 이런 것들을 우리가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강조하지.
하지만 둘러봐. 실은 어른들도 굉장히 연습하지 못한 채 커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아.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나만 보아도 일상 속 누군가를 포용하는 마음이 이렇게 부족해 공부하고 반성하고 또 그러는 걸.
유명한 오은영 박사님이 가끔 말씀하시는 뼈를 깎는 노력, 그걸 해야 할 것 같아. 아들과의 사이는 어디에다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데 왜 딸하고의 사이는 이렇게 어려운 걸까. 아들과는 공감도 어렵지 않고 의지도 투명하게 보이고 지성적인 대화도 무난하게 이어지는데 왜 딸 앞에는 엄마의 자질이 후퇴하는가? 내 딸이 편안하게 나를 좀 대해주었으면 하는 게 욕심일까? 그 비밀을 알고 싶다. 왠지 모르지만 해답이 아동 인권에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