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샘 Mar 03. 2023

철십자가에 노란 리본을

#25일 차, 수많은 십자가들

성 야고보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걸었던 이 길을 걸으며,
그 숭고한 뜻을 마음에 새기고,
그 뜻을 마음에 품고 끝까지,
산티아고까지 걸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이동 : El ganso --> Acebo





어제 장을 보면서 오늘 아침거리도 함께 샀다. 

커터가 물집관리를 하느라 바빠서 내가 거의 아침준비를 했다.

급하게 토스트를 굽고, 버터와 잼을 내놓고, 바나나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알베르게에서 커피와 우유 그리고 티를 준비해 주어서 우리는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 혹시 몰라서 햄도 준비했는데, 잔이 자기를 위해 사주어서 고맙다며 맛있게 먹어준다. 


걷기를 시작하고 얼마 안 가서 다들 아침을 준비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어 부끄러웠다. 정말로 진심으로 내가 해 주고 싶은 것, 내가 마음내서 해 줄 수 있는 작은 것이 그것일 뿐이었다. 고맙게 생각해 주는 그들이야말로 아름다운 나의 친구들이다. 




어제 비가 와서 스웨터가 젖는 바람에 모든 옷을 다 빨았는데, 다른 옷들은 금방 말랐는데 스웨터는 밤이 새도록 걸어놓아도 마르지 않아 등산배낭 겉에 매달고 걷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빨래가 마르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이제는 빨래를 모아서 세탁기와 건조기에 돌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바람막이 재킷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걸치는 것이 그 스웨터인데, 젖은 스웨터를 메고 걷는 모습은 누가 봐도 좀 우스웠지만 이제는 그런 우스운 꼴도 감당할 수 있다. 


할 수 없이 긴 팔 옷을 2개 겹쳐서 입었다. 캐시와 에바가 춥지 않으냐고 걱정을 해 주었다. 

걸을 때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등산을 하는 코스라 잠깐 쉴 즈음이면 상당히 추웠다.

조금 걷다가 정상을 오르기 직전에 카페에 들러 카페올레 그란데와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마이클이 치즈케이크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잔과 내가 "나도!" 하고 동시에 말을 했고, 우린 또 활짝 웃었다. 정상으로 오르면서 날이 추워 캐시의 재킷을 빌려 입었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크로스 오브 페르 (철 십자가)에 도착했다. 

더웨이라는 영화에도 나온 곳으로 철 십자가 아래로 수많은 돌들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나도 십자가 위에 올라가 수많은 장식들 사이로 노란 리본을 걸었다. 집에서 가져온 돌들을 쌓기도 하고, 뭔가 의미 있는 것들을 놓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하거나 자신의 까미노를 돌아보는 곳이다. 난 노란 리본을 달면서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가족을 위한 돌과 친구를 위한 돌은 이미 전에 보았던 십자가에 두고 기도를 했던 터였다.


날이 추우니 차와 커피를 마시고 걸으면 자꾸만 소변이 마렵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번 카페에 들르기도 힘들고 해서, 자연화장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중간에 줄리를 만났다.

독일에서 온 줄리는 부르고스부터 걷기 시작했다는데, 그날 나와 만나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후 독일친구들과 함께 걷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오늘은 어쩐지 혼자다.

에바와 독일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줄리도 우리 일행으로 들어와 걷기 시작했다.




걷는 길에 철조망을 따라 사람들이 만든 갖가지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누군가 철조망에 나뭇가지를 십자가 모양으로 걸쳐 놓은 걸 보고, 그다음 순례자가 또 그렇게 만들고, 그런 방식으로 십자가는 늘어났을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 내내 옆으로 난 철조망에는 십자가가 가득 걸려 있었다. 

그 모양도 크기도 디자인도 여러 가지였다.

십자가를 만들어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지 않나 싶었다.

이 길이 원래 종교 순례자 길이었음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이곳에 십자가를 만들어 걸고, 기도 했을 것이다.


성 야고보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걸었던 이 길에서, 그 숭고한 뜻을 마음에 새기고,

그 뜻을 마음에 품고 산티아고까지 걸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한 고행을 통해 신앙을 신실하게 다진 순례자들을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길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하고 날도 추워지고, 피곤함이 몰려올 즈음 어느 목적지까지 가는 게 좋을지를 의논하기 위해 우리 일행은 잠시 멈췄다. 

에바는 피곤하다고 했고, 마이클과 커터는 계속 걷고 싶다고 했다.

결국 커터와 마이클은 계속 가고 나머지 일행은 이곳, 새로 생긴 알베르게에 머물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잔과 캐시와는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들어와 보니 알베르게는 호텔처럼 안락하고 쾌적했다.


영화 더웨이에서 주인공 일행들이 호텔에서 머무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늘 우리도 그런 호사를 누리는 것 같다며 서로 즐거워했다.


나는 지금 호텔같이 안락하고 전망 좋은 로비에서 와인 로제 한 잔을 마시며 일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맘껏 여유와 호화로움을 즐기고 싶다.



2015년 9월 14일  아세보에서



이전 07화 단층침대에서 자는 행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