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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샘 Mar 06. 2023

침대가 없었지만, 전화위복

#28일 차, 반드시 모든 구간을 걷겠다는 욕심

욕심을 좀 줄이고,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인연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면...


이동 : Pereje --> Fonfria




아침 일찍 캐시가 깨웠다.

어젯밤 잠을 설쳤고, 새벽녘에 잠이 들었는데, 그렇게 잠깐 잠들었을 때 캐시가 깨운 것이다.


정말 비몽사몽간에 준비를 하고 나섰는데 다음 타운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나서야 우산을 두고 온 것을 알았다. 가볍고 작고 선물 받은 우산이라 많이 아쉬웠다.

지난번에 모자를 바람에 날려버리고, 친구가 준 팔찌도 잃어버리고…….

그게 까미노라고 옆에서 캐시가 위로해 준다.


중간에 한국인 부부를 만났는데 실과 바늘이 있냐고 물어본다.

잔이 필요할 것 같아 잔에게 준 실과 바늘이 이젠 잔도 필요 없게 되어, 그것을 이들 부부에게 주었다. 

부인이 물집으로 고생이 심하다고 했다.

언제 출발했냐니까 8월 30일에 생장에서 출발했단다.

8월 30일에 출발했는데, 이곳까지 왔으니, 얼마나 빨리 걸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을 정도다.


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 한국인들이 사실 뭔가를 빨리빨리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지, 사실 나도 성급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그게 다 우리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아온 역사를 딛고, 최근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룬 바탕에는 이러한 빠른 속도가 필요했다고. 잔도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다.

작은 나라는 역사 속에서 많은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이해가 간다고. 

그래서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내가 '잔은 좀 특별하다. 음악 하는 사람이 역사와 철학에 관심을 갖기 쉽지 않은데.'라고 물었더니, 잔은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역사와 정치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해준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고, 몇 사람이라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지 않겠냐고.'


율리아와는 호텔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즈니스로 온 손님보다 투어리스트로 오는 손님이 더 재미있다고 했다. 그런 손님들이 더 친절하단다. 예를 들어, 어느 식당이 맛있느냐 어디가 구경하기 좋으냐고 물으면 거기에 답해줄 때가 재미있고 보람이 있다고…….




중간에 사진을 찍는데, 캐시가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느냐고 한다. 

사진 찍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난, 그저 웃었다.

캐시는 여러 가지로 자신의 기준이 강한 편이다.

이젠 그런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그저 웃어넘긴다.


잔이 옆에서 내 편을 들어준다. 

사람마다 관심 분야가 다르지 않느냐고…….

그리고 자기 사진을 찍어 주어서 고맙다고…….^^

사실, 잔도 자신만의 기준이 강한 젊은이인데, 이번에 내 편을 들어주니, 의아하고 고마웠다.


하여튼 이제는 정말 서로에게 편하다…….

사실, 캐시가 나에게 대놓고 뭐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너무 편한 관계여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잔도 캐시가 너무 편하니까 대놓고 내 편을 드는 것이고…….

잔은 이제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좋은 풍경이 나오면 먼저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집에 돌아가면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사진을 정리해야겠다.

잔을 위해서도…….^^



오후에 오세브레이로에 도착해, 작고 예쁜 성당에서 스탬프를 받고, 그 분위기에 감동받을 때까지도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다.

오세브레이로에 도착했을 때, 또 비가 오락가락했다.

멀리 작은 성당이 보였는데, 나와 캐시가 함께 둘러보았다. 그 작은 성당 한 구석에 각 나라의 말로 된 성서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 한국어로 된 성서가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난 이곳이 너무나 포근하고 아름다워 한참 앉아있었다. 또 마음이 정화되는 경험을 하고,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일행과 다시 걸었다.


이곳에 큰 알베르게가 있었고,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이곳에 머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들은 좀 더 걷자고 했다. 순례자들이 많아 번잡한 곳보다 좀 더 조용한 곳이 좋을 것 같았고, 또 개인적으로 나는 몸이 굉장히 좋은 상태여서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좀 더 걷자 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비가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음 마을로 왔더니 알베르게가 없다 한다.


이때까지도 마음이 조급하지는 않았다.

다음 마을까지 4km가 남았고, 그 정도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들은 또 여유롭게 그 마을 슈퍼에서 간단히 음료수와 과자를 먹고 잠시 쉰 후, 또 걸었다.


그.

런.

데.

다음 마을에도 침대가 없다고 했다.




왠지 심상치 않아, 다음 마을의 알베르게 여기저기 전화했더니 아무 곳에도 잘 곳이 없었다.

다시 그다음 마을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그제야 예약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곳까지 가려면 6km를 걸어야 하고, 이미 5시가 다 되어갔다.

할 수 없이 캐시와 나 그리고 율리아는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고, 잔은 걸어가겠다고 했다.


정말로 많이 아쉬웠다. 이렇게 베드가 꽉 찰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나도 걷고 싶었다. 결코 택시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했다.

걷는 것을 앞세우는 것이 오히려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 산티아고 순례 길을 시작할 때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만 걷겠다고 소박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에 와서 반드시 걷고 싶다고, 단 한 구간도 걷지 않는 것은 용납을 못하겠다고 우기는 것도 고집이자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숙소에 와서 생각해 보니, 잘 결정했다.

비가 많이 내렸고, 만약 나까지 걸었다면 잔이 무척 고생했을 것이다. 나 때문에…….


이윽고 예약한 알베르게에 도착해 알베르게에서 소개해 준 장소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더니,

숙소에 묵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수십 명의 순례자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와서 보니 엊그제부터 까미노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 마을이 사리아인데, 사리아부터 까미노를 시작해도 산티아고에서 완주증을 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리아 혹은 그전 마을부터 까미노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베르게에 침대가 모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이어 서로를 새롭게 알아가는 것은 늘 즐겁다.

핀란드에서 온 세리에를 만나 이것저것 즐겁게 얘기한 것이 기뻤다. 함께 사진을 찍고 서로 부엔 까미노를 바라고 헤어졌다.


이제 한 일주일만 걸으면 마지막이다.

잔이 '우리는 까미노의 가족'이라고 했다.

맞다!

이것이 까미노의 참 멋이라는 생각이 든다.


율리아와 걷는 것도 좋다.

그녀는 정말로 유쾌하다!!!


오늘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나탈리에도 만났고,

커터도 만났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인도 만났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하루였지만,

이렇게 따뜻한 저녁을 함께 나누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바로 그게 까미노 아니겠느냐고 (That's the Camino!)

우리들은 말한다.

그게 바로 삶이 아니겠느냐고 (C'est la vie!)

나는 그것이 바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우리가 살아갈 때,

때로 힘들고 고통을 겪을 때가 있고,

때로 하고 싶었던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

너무나 나 자신에게 속상할 때가 있지만,

욕심을 좀 줄이고,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인연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면,

그 또한 멋진 일이 아닐까?

그것이 또 삶이 아닐까?


내일이 기다려진다.



2015년 9월 17일, 폰프리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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