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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한 Jan 16. 2024

꼰대 남편 고쳐 쓰는 방법

# 9화. 꼰대 남편 길들이기

남편은 6시 20분에 집에서 나가 회사 불을 켤 만큼 성실하다. 성실하고 성실해서 성실하기만 하다.


결혼 전에는 성실함에 반했는데

결혼 후에는 성실만 하니까 짜증 날 때가 많았다.


성실하다 이 단어 안에는 점과 단점이 함께 공존한다. 성실해서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월급을 차곡차곡 잘 모은다는 점. 반면 돈을 아끼려고 불을 끄고 달빛에 몸을 비춰 샤워하고 변기물도 아끼려고 자동 물 내림 비데를 수동으로 바꿔놓는다는 단점.


나는 되도록 불을 켜고 남편은 되도록 불을 끄고

휴... 안 맞아... 불편하다.


결혼을 결심하고 처음으로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시아버님의 첫마디 "얘가 뭐가 좋아서 결혼을 한다 그래 얘 보통 피곤한 애가 아닌데~ 주말에도 새벽에 일어나서 자는 사람 다 깨우고 어휴~괜찮겠어?" 아직 뭘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셨.


그때는  눈에 콩깍지가 씌어 "에이 부지런하면 좋죠~"라고 대답했다. 





결혼 후

성실하기만 한 남편이 시아버님의 말처럼 주말에도 6시에 일어났다. 요리를 못하니 일찍 일어나서 배고프다며 달달한 내 늦잠을 방해했다.


성실하게 회사 일 하기도 벅찬 이 사람은 요리기능을 탑재하기 불가능한 남편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담당해야 집이 잘 굴러간다고 믿는 꼰대남편이다.


일단 아침은 혼자 먹도록 길들여 보자. 아침에 뜯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찾아봤다. 갓 구운 건 아니지만 보기에 갓 구운 것처럼 보이는걸 찾아보겠다며 쿠팡 폭풍검색, 후기 좋은 걸로 몇 가지 폭풍주문! 아침에 번갈아 먹고 가라 했다. 다행히 빵들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침은 이제 날 깨우지 않고 혼자 해결!



성실한 꼰대남편은 아이를 시댁에 꼬박꼬박 잘 데려간다.

성실하게 토요일마다 간다. 나는 잠시 쉬는 시간이라 좋은데 시어머니의 우쭈쭈를 일주일마다 겪고 오니 집에서 버릇을 들여놓으면 시댁 가서 다시 리셋이 된다.


시댁에 다녀온 날은

나 물 한잔만

귤 좀 까 

따뜻한 유자차가 마시고 싶네 이런 식이다. 

시댁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했다는 얘기다.

우리 아 물 줄까? 귤 먹을래? 따끈한 유자차 마시렴

이러면서 턱 밑에 가져다주셨겠지


꼰대 남편은 수발 들어주는 행위를 인정받고 있고 대접받는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고칠까..?


내가 잔소리해도 안될 거 같다

딸의 수발을 들게 하자!

아빠~나 물 좀.

아빠~ 나 사과.

아빠~ 아빠가 해주는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어.


남편의 얼굴에 머리만 긴 딸은 아빠의 꼰대 근성을 슬슬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딸 물 떠다 주다가 자기 물 도 먹고, 먹고 싶은 과일도 딸 주다가 본인도 먹고, 요리라고는 라면도 혼자 못 끓여 먹던 남편이 딸 계란 프라이를 해주려고 프라이팬을 찾는다.

계란 깨기에 실패하고 불 조절 잘못해서 태워먹고

반숙을 원하는 딸이 "노른자는 터지지 않게요~" 하면 그 요구사항도 맞춰준다.

내가 외출해도 한 끼 정도는 알아서 먹는 남편이 되었다.


물론 남편이 요리를 더 잘하고 퇴근 후에 청소 빨래 등 척척 해주는 남편과 사는 여자들은 도대체 이런 남자와 어떻게 사냐며 혀를 내두르고 인상을 쓸 수 도 있다. 내 친구는 심지어 "너 이번 결혼 망했네"라는 저주스러운  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데 그냥 이 남자를 고쳐서 사는 편이 난 더 좋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줘도 꿀꺽꿀꺽 투정 없이 마시고 냉동실에 있는 잡채를 대강 볶아 고춧가루 뿌려 밥에 덮어주면 이런 잡채밥은 중국집에 가야 먹는 거 아니냐며 눈이 동그레 지는 남편 말이다.




내 친구 한 명은 남편과 사이가 참 좋다.

얘기도 잘 통하고 집안일도 잘 도와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랑표현을 잘 안 한다는 거다.

흠... 내가 보기에는 집안일 도와주고 얘기 잘 들어주면 그게 사랑표현 아닌가 싶은데 그거랑은 또 다르단다.


우리 집 꼰대 남편은 집안일을 하지 않지만 집안일 도와주시는 장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 내 얘기를 잘 들어주는 편은 아니지만 내 말을 잘 듣는다.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이 길지는 않지만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를 적절한 상황에 잘 쓴다.


뭐 가끔 화장실 변기 청소 하고 있을 때 고마워라고 세 글자 오면 '우 씨 이런 거 하기 싫어서 고맙다는 거야 뭐야!' 열이 받기도 하지만 회사에서 내가 뭐하는지 모를 테니 넘어간다. 집안에서 아이들 잘 키워주는 와이프에게 하는 꼰대식 최고의 칭찬이라고 알게 되었다.


꼰대 남편, 고집스러운 남편 일 수록 길을 잘 들이면 길들여놓은 방향대로 가는 거 같다. 신혼 때 싸울 일 없이 마냥 행복했지만 티격태격 맞추고  조금씩 바꿔 길들인 10년 차 지금이 더 좋다.


애 낳고 나는 애랑 자느라 10년째 각방살이다.

침대 끝에 매달려 혼자 자는 의 발모양이 불쌍해지는 걸 보니 이제 좀 부부 같다.


꼰대 남편 오늘도 고생했어


ps. 오늘따라 내 남편이 불쌍해 보인다면 찐 부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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