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두껍고 무거운 가면을 쓴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다시피 직장을 다녔다. 직장 동료들과 퇴근 후 술도 한잔하고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했지만 즐거움은 그때뿐이었다. 거무튀튀하고 축축한, 왠지 만지고 싶지 않은 구정물 같은 게 툭툭 떨어지는 무언가가 내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나는 이 일밖에 할 수 없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이내 자동응답기 같은 속도로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열이 확 받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왜 없어? 난 교수님 추천서로 취직도 일찍 했고, 친절 직원으로 뽑힐 만큼 역량도 갖췄어. 지금 이 생각이 드는 건 내가 계약직이고 직장 환경이 내 맘에 들지 않아서야. 환경이 좋은 직장으로 정규직 입사를 하면 이런 궁금증 들지도 않을 거야'
그렇게 나는 두세 번의 이직을 더하고 마침내 종합병원 원무행정 정규직 자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나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기쁘지 않았다. 심지어 환경도 좋고 직장 동료도 좋았다. 집과 거리도 가까웠다. 연봉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왜 기쁘지 않았을까?
이직하기 전에 내가 짚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라고 말한 것이 내 목소리였다는 점이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내 목소리로 묻기에 당연히 나인줄 알았다. 그건 '나'가 맞지만 '참나'는 아니었다. '진짜 나' 말이다.
목소리의 주인인 '나'는 자아, 그러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90년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의 사회적 통념 속에서 자라온 껍데기였다. 자아는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나름의 정보를 정리해서 머릿속에 저장해 둔다. 과거에 자부심을 느끼는 행동을 했어도 주변에서 알아주지 않으면 내 자아는 자신에게 낮은 점수를 매겼다. 특히 내 자아는 낮은 점수의 기억을 주로 저장해 두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루틴을 반복하던 내 자아는 당연히 스스로에게 낮은 점수를 매길 수밖에 없다. 머릿속 목소리가 그런 말을 한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제일 먼저 들었던 '나는 이 일밖에 할 수 없을까?'라는 궁금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