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

가파른 경사를 타고 내려 오며 마주한 생각들

by HERMITAGE


경사가 아주 가파른 것이다. 조절하기 어려운 속도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었다. 익숙하게 낯선, 새로운 곳에서 그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엇이 부끄러운지 낯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수줍음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으로 주변을 서성였다. 주위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무리가 있었고, 거기에서 탈락되어 따로 서 있었다.


발아래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 요즘 자주 보이는 전동 방식은 아니고 수동으로 밀어서 움직여야 하는 킥보드였다 분명. 체중을 실어 빠르게 내달리던 것은 바닥에 두 개의 바퀴가 달린 덕분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한 번은 차가운 바닥에 발을 디디다 더 차갑고 무거운 킥보드 바디에 발뒤꿈치를 쌔게 부딪힌 기억이 떠올랐다. 소리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묵직하기만 한 고통이 뒤따라 한 번에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깊게 남아있었다. 경사가 급해질수록 겁이 났다.


더 빨라지면 멈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기 때문이다. 멈출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다행히 선을 넘기 직전에 가서야 겨우 멈춰 섰다. 차갑고 까슬한 바닥에 맨발을 가까스로 디디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보면 볼수록 주변 풍경이 낯이 익었다. 익숙한 건물과 그것들을 보고 떠오르는 이름을 줄 세워 머릿속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긴 언젠가 와본 곳이다. 꼭 세트장처럼 한 곳에 몰아넣어 만든 이 공간은 무슨 의도가 숨어있기라도 한 듯 규칙을 갖고 정렬되어 있었다.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어 무언의 힌트를 주기라도 하듯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은근히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설정이 숨어있는 것 같다. 내달리던 건 금방 끝이 났다. 충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면에 발이 닿아 버린 것으로 생각만큼 아프진 않았다는 걸로 일단락되는 분위기였다. 밝기만 하던 시야가 아주 조금씩 희미하게 반대로 또렷해지는 걸 보니 이 세계도 곧 끝이 나려나 보다. 새로 산 필립스 스마트 전구의 빛이 지나치다 할 만큼 밝다고 생각하던 찰나. 하얗게 설정해 둔 조명의 불빛을 기다렸다는 듯 눈으로 삼킨다.


Hermitage

@big_be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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