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없이도 좋은 하루

주말 연희동 일상

by 와인빌런

10시 요가수업에 가려고 9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20분이면 요가원이 있는 이대역에 도착하기에, 40분은 요가원에 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주말에는 버스 배차 간격이 다소 느긋해지기는 하지만, 오늘은 이례적으로 버스가 20분 후에 도착한단다. 이대로라면 제시간에 요가원에 도착하기가 빠듯할 것 같아, 11시 20분 수업에 가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근처 카페에서 1시간 동안 책을 읽기로 했다.


오늘의 책은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 7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한 편을 읽고, 다음 편을 읽고, 또 그다음 편을 읽다 보니 멈출 수가 없어서 요가를 포기하고 계속해서 독서를 이어갔다. 2시간 반 정도 책을 읽다 집에 가서 내친김에 밥도 해 먹었다. 두부를 듬뿍 넣은 된장찌개를 끓이고, 전날 만들어 둔 당근라페를 넣은 김밥을 만들었다. 카페 가서 책을 읽고 집밥을 해 먹으니, 요가를 하지 않아도 뿌듯한 일요일 오전이었다.


오후에는 로청여사님(로봇청소기)께 청소를 맡겨두고 홍제천 산책을 했다. 집 앞에서 홍제천을 따라 3.5km가량을 걸으면 한강 망원공원까지 이어진다. 수많은 러너들 사이에서 중간중간 1분 정도 같이 뛰어보기도 하고, 산책 나온 귀여운 강아지들도 구경했다. 홍제천을 따라 걷다 한강을 찍고, 돌아올 때는 중간에 홍제천을 빠져나와 가재울 뉴타운과 명지대학교 근처로 걸었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 구경할 곳 천지다. 온라인으로 부모님께 쌍화탕을 시켜드리던 그 한의원이 여기 가재울 뉴타운에 있어서 깜짝 놀랐다.


산책을 마치고 동네 마트에 들러 딸기를 한 팩 사서 까만 봉지에 넣어 달랑달랑 들고 오는데, 조그마한 갤러리들이 군데군데 있는 것이 새삼 눈에 띄었다. 작은 무인 갤러리. 그냥 들어가서 그림을 볼 수 있었고, 입구에는 그림별 작가 이름과 가격이 적힌 리스트가 붙어 있었다. 이미 팔린 그림 제목 옆에는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어서 얼만가 싶어 리스트를 넘겨보니 거기서 제일 비싼 그림이었다. 450만 원. 역시 사람의 눈이란. 0 하나가 빠진 금액이었다면 어쩌면 샀을지도 모르겠다. 과일가게, 네일숍, 떡집 사이사이 갤러리와 공방이 나란히 공존하는 이 동네가 참 마음에 든다.


일요일만큼은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정해진 루틴대로 보내는 편이었다. 오전 10시나 11시 20분 요가수련을 하고, 요가원 근처 카페에서 커피나 말차라테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그리고 집에 와서 테이크아웃이나 배달음식으로 느지막이 점심을 먹는다. 그 후 유튜브를 틀어놓고 청소, 빨래,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등의 집안일을 하고, 한숨 자거나 산책을 한다. 일요일 오전 요가는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상징과 같은 것이어서 웬만하면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특별한 사유 없이 일요일 요가를 쉬면 자책과 후회로 남은 일요일 오후까지 망쳐버리기 일쑤였다.


오늘은 요가를 하지 않았다. 버스가 늦게 오는 것이 발단이 되긴 했지만,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집밥을 해 먹고 산책을 하고 과일을 사고 잠깐 그림 구경도 했다. 요가를 하지 않아도 그대로 좋은 일요일이었다. 요가를 안 하면 큰일 날 것만 같은 강박에서 벗어나, 날씨 좋은 일요일 오전에는 등산도 하고 브런치도 즐기고 달리기도 하는 다양한 옵션을 얻었다.


무인 갤러리 @연희동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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