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by 이도영

맹장수술을 받느라 5박 6일 동안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정말 아팠습니다. 진통제를 두 번이나 맞았어요. 곁에 있는 아내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내가 제 손을 꽉 잡아 준 덕분에 잠이 들 수 있었어요. 저를 위한 아내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아내가 응원해 준 덕분에 수술에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어요.


고통을 느껴 보니 다른 사람의 고통이 보였습니다. 6인 병동에 입원했어요. 그날 밤 옆자리에 80대 할아버지께서 오셨습니다. 밤새 끙끙 앓으셨고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계속 반복하셨어요.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아프시면 저렇게 앓으실까’ 그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건너편에 있던 20대 청년이 할아버지의 끙끙 앓는 소리에 잠을 깼나 봅니다. 계속 한숨을 내쉬며 잠을 이루지 못해 불편하다고 불만을 내비쳤어요. 할아버지는 소변과 대변을 스스로 가릴 수 없었습니다. 호스를 연결하여 대소변을 가리셨어요. 병실 전체에 똥 냄새가 가득했어요. 그 청년은 냄새가 나 힘들다고 간호하는 할머니께 방향제를 뿌려달라고 했습니다. 다음날에는 할머니 전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조용히 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저는 그 청년이 가여웠습니다. 아직 어리구나 싶었어요.


사실 저도 어린아이였습니다. 2018년에 아내가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았어요. 아내가 힘들어할 때 손을 잡아 주지 못했어요. 오히려 TV로 월드컵을 봤습니다. 덥다고 에어컨을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며 축구 경기를 봤어요. 아내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고통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웠어요.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부끄러운 제 모습을 직접 아프고 나서야 직면하게 됐어요.


남의 고통이 내 고통으로 다가오면 나이가 적어도 그 사람은 어른입니다. 남의 고통이 내 고통으로 다가오지 못하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그 사람은 아이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엄마가 힘들게 일하고 현관문에 들어섭니다. 열 살 아이가 엄마의 축 처진 어깨를 보고 엄마의 고통을 느꼈어요. 스스로 라면을 끓여 저녁을 해결합니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입니다. 반면에 부인의 축 처진 어깨를 봐도 전혀 공감하지 못한 채 저녁을 차리라고 하는 오십 대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은 아직 아이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아픔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낄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태도예요. 그것이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사랑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라고 생각해요.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내가 가진 것을 늘리는 ‘소유의 증대’입니다.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가고, 더 좋은 차를 사는 삶입니다. 소비를 통해 원하는 것을 구매하고 이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거예요. 두 번째 방법은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나눔의 충만’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 부모가 아이에게 전하는 사랑이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맛있는 반찬을 내가 먹지 않고 내 아이에게 먼저 주는 것이에요. 부모는 아이가 먹는 모습을 바라만 보아도 배부르다고 하지요. 나눠주면서도 마음이 충만하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나누면서도 채워지는 나눔의 역설이지요.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에 공헌하는 것도 이에 해당해요. 남을 위해 무언가를 나누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공헌감을 통해 우리는 지금 바로 행복할 수 있어요. 행복의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와는 완전히 결이 달라요.


이성복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합니다.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지요. 하지만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일이에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습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사랑은 내가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나눠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두 번째 ‘나눔의 충만’을 생각하지 못하고 첫 번째 방법에만 매몰되어 있을까요? 왜 우리는 ‘소유의 증대’만을 집착할까요? 자본주의에 이미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내 기준으로 살지 못하고 자본가들의 생각과 자본의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아이를 사랑하십니까? 돈을 사랑하십니까?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면 아이를 다그치지 않으신가요? 우리 아이가 남보다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지 않으신가요? 아이에게 선행 학습을 시키고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돈 때문이지 않나요?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니까요.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제 친구가 SNS에 영상을 올렸어요. 네 살 된 친구 아들이 <그레이트북스 공룡 친구>라는 전집을 읽고 비가 내리는 원리와 물의 순환에 대해 설명하더라고요. 동갑내기인 제 아들에게 보지 못하는 모습이었지요. 어느새 그 책을 사려고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저도 사실은 아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와 제 아이를 비교하고 남보다 뒤처질 것을 염려하고 있었어요.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알아보고, 영어 공부에 노부영이 좋다 ORT가 좋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에게 그것을 시켜야 하나 고민했었습니다. 제 아이가 그것을 좋아하는지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제 아이의 기준이 아니라 남들의 기준에 따라 제 아이를 판단하고 있었어요. 내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살면 그 사람은 주인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은 노예입니다. 자본과 자본가 또한 다른 사람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돈과 자본의 노예로 살면 우리 아이들도 그대로 노예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으로 살면 우리 아이들도 주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가 말했습니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죄’라고 말입니다. 내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히만은 유죄라는 것이에요.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르면 유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아이히만 같은 존재들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은 일본 사람들의 생각을 따랐습니다. 5.18 공수부대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권력자의 명령에 따랐어요. 우리는 괜찮을까요? 돈을 주면 자본가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나요? 젊은 사람들이 취업하려고 간과 쓸개를 모두 드러내 보이지 않나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돈을 벌고 싶어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결혼하고 부모님께서 지원해주신 돈과 아내와 제가 모은 돈을 몰래 주식에 투자했어요. 철저히 돈의 노예였습니다. 하루 종일 주식의 등락만 생각했어요. 교실 속 아이들의 모습에 무관심하게 됐고 가정에서도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요. 잃은 것은 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인간관계, 남들이 저에게 갖고 있던 신뢰도 잃었어요. 무엇보다 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무참히 깨졌습니다. 많은 것을 잃고서야 반성하게 됐어요.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주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주인공이 되어 되려면 가장 필요한 덕목이 용기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미셸 푸코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파르헤지아’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비난받을 가능성과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자기 생각과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용기를 말합니다. 제 부끄러웠던 허물을 공개하는 것도 나름의 파르헤지아예요. 부끄러운 기억을 공개하는 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끄러운 잘못이라는 문턱을 넘을 수 있을 때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척도만큼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어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이런 아이들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아이. 둘째, 주인으로 살아가는 아이. 셋째, 자기가 생각한 것을 용기 있게 말하는 아이. 이런 아이들로 자랄 수 있도록 아이와 함께 논어를 읽는 것을 제안합니다. 논어에서는 네 가지 덕목을 강조합니다. 예, 인, 충, 서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을‘인(仁)’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공감하는 것을 ‘서(恕)’라고 해요. 논어를 읽으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아이로 키울 수 있습니다. 논어를 읽을 때는 공자와 제자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나만의 관점과 나만의 해석으로 고전을 읽을 때 자신의 기준이 생깁니다. 기준의 생산자가 될 수 있어요. 주체력을 기르고 주인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습니다. 논어를 읽으면서 부모가 아이의 말을 경청하면 아이는 자기 생각을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이 모든 과정에서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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