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8년생 태국 골프장 캐디의 삶

캐디가 되는 과정

by 에밀리

빨래방에 처음 갔는데 기계가 작동되지 않아 한참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액체세제를 넣어야 하는데 나는 가루세제를 넣어버린 것이다. 이유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갑자기 일어났다. 말 한마디 없이 다가와 물을 채우고, 손으로 세제를 퍼내기 시작했다. 너무 열정적으로 물을 떠다나르고 손으로 퍼내는 모습에 나는 멍하니 그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직원인가...?' 그렇게 세탁기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여자는 직원이 아니라 자신의 빨래를 기다리고 있던 근처 골프장에서 일하는 캐디였다. 내가 쩔쩔매는 모습에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모습에 감동해 나중에 다시 만나면 보답해야지, 하며 연락처를 교환했다.

스크린샷 2025-07-12 오전 11.43.22.png 마애의 메시지

회사 일이 바빠 잊고 지냈는데,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빨래방에 왔더니 네 생각이 났어. 요즘 어때? 회사는 다닐만 해?’ 그렇게 우리는 저녁약속을 잡고 다시 만났다. 마애는 36살, 나보다 14살 많았고 아홉 살 된 아들이 있다고 한다.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고 있다며, 기회가 되면 한 번 따라와보라고 했다. 마침 열흘 뒤 회사 휴일이 잡혀 있었고, 쉬는 날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약속이 잡혔다. “11시 40분까지 만나!” 처음엔 그녀와 함께 캐디 일을 도우러 가는 줄로만 알았다.


새로운 일을 해보는 건 언제나 환영이었다. 이건 학생창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습관인데, 그 도메인에 속해봐야 진짜 고충을 알 수 있고, 그 고충을 해결해주는 것이 창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의 첫 정부지원사업은 식당 자영업자를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나는 식당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어떤 일이든 경험할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IMG_7578.HEIC
IMG_7579.HEIC
IMG_7580.HEIC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오늘은 일을 하는 날이 아니라고, 대신 캐디들끼리 골프를 치는 날이라고 한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실제 골프장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드넓고 잘 다듬어진 필드를 걷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걷는 게 아니라 골프카트를 타고 다녔다. 캐디의 일은 골프카트를 몰며 클럽을 챙기고, 점수를 적고, 공을 따라가며 필요한 걸 도와주는 일이었다. 골프는 생각보다 훨씬 럭셔리한 운동이네, 그늘진 카트에서 편하게 이동하고, 누군가가 늘 옆에서 보조해준다니.


이날은 캐디들이 쉬는 날이라 직접 필드에 나왔고, 그들을 도와주는 역할은 캐디 지망생들이 맡았다. 앉아있는 내게 누군가 태국어로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나를 새로 들어온 캐디 연습생으로 착각한 거였다. 마애가 한국에서 온 친구라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이 골프장엔 손님의 80%가 한국인일 정도로 한국인이 많다.


전에 밥을 먹다 마애에게 물었다. “아는 한국어 단어 있어?”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퐁당? 오른쪽? 오르막?”


알고 있는 단어들이 전부 골프장에서 쓰는 단어들인게 웃겼다. 유튜브로 한국어를 배웠다는 한 캐디는 한국어로 자연스러운 대화도 됐다! 나는 내가 배고플까봐 걱정하는 캐디들에게 둘러쌓여 이것저것 먹을 걸 받아 먹었다. 치킨랩, 진짜 코코넛, 맥주, 과자까지. 나는 순식간에 배가 불러버렸고, 더는 못 먹겠다고 하자 한 명이 농담을 던졌다. “나는 위험한 사람이라 안 먹는 거네!”

IMG_7587.HEIC
IMG_7583.HEIC
IMG_7581.HEIC
IMG_7627.HEIC

필드로 나가자 마애 옆에는 양갈래머리를 한 작은 캐디 연습생이 붙어 있었다. 너무 어려 보여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17살이라고... 마애는 15살 때부터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고 하니 그도 이 아이처럼 시작했을 터다. 캐디가 되고싶어 연습중인 아이는 골프카트를 운전하고, 타블랫에 점수를 입력하고, 공을 찾아 공의 위치를 기억하고, 골프채를 바꿔주는 등 실제 캐디가 하는 것처럼 많은 것들을 보조했다. 이 친구의 삶이 궁금해 더 깊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라 더 다가갈 수 없어 아쉬웠다. 세삼 마애가 영어를 정말 잘하는 편이구나 싶었다.

마애는 이 작은 캐디를 종종 혼냈다. 공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기억을 잘 못해서였다. “이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 달 정도 입원했었어. 그래서 기억을 잘 못하는 것 같아.” 그래도 이 어린 캐디는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볼펜을 빌려달라고 해 빌려줬더니 그 아이는 손에 직접 점수를 적고 있었다. 기억을 못하니까, 손등에라도 기록을 남기기 위해.


내 볼팬은 0.3mm라서 많이 아플텐데,

IMG_7630.HEIC
IMG_7631.HEIC


아니나다를까 0.3mm의 볼팬은 사람의 손등 위에서는 써지지 않았고, 그는 다른 볼팬을 찾아야만 했다. 그의 손바닥과 손등 위에 파란색 잉크가 점점 늘어나는걸 나는 보고만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는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캐디가 되어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필드를 뒤어다니며,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등에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가던 그 아이의 노력하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IMG_7677.HEIC 더운 날씨에 공을 찾아 뛰어가는 어린 캐디의 뒷모습
IMG_7635.HEIC
IMG_7615.HEIC
IMG_7632.HEIC
골프카트도 운전해봤다ㅋㅋㅋ


keyword
이전 20화월급을 비닐봉지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