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 속에 여한이 있다는 것
약을 세어봤다. 하나, 둘.세엣, 네엣.
그리고 한 봉지 더.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누워서 몇주가 흘렀는지 모르겠다.
큰 병원에 가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했지만
속시원한 말은 듣지 못했다.
물론 어딜가도 똑같이 하는 얘기는 있었다.
면역이 아주 약해졌다는 것.
천장을 보고 끊임없이 기침을 하다가
문득 스쳐지나가는 문장 하나.
이렇게 죽는다.
영화 일을 그만두고 나올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어. 하고 싶은 걸 해봤으니까.
그런데 막상 죽음이란 게 앞에 와서 인사를 하니
나는 반가이 맞아줄 수가 없다는 걸 절감했다.
죽는게 그렇게 억울하니?,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아? 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고 싶었던 것들. 정말 꼭 해보고 싶었던
모든 것들. 아무거나 상관없어. 얘기해보자.
이내 절실한 마음들이 뭉게뭉게 떠올라
내 방을 가득 채웠다.
롯데월드에 가서 마음껏 놀기.
남산타워 위에 올라가보기.
불꽃축제 가보기.
벚꽃축제에서 사진도 찍어야지.
아, 친구들과 스키장에 가기로 했는데
매해 가지 못했다.
독일에서 겨울학기를 마치고 돌아오면
이미 스키장은 폐장을 하고 난 후였다.
여름에는 워터파크 가기.
친구가 그렇게 재밌다고 했던 춤도 배워보고 싶다.
춤치면 어때. 노래를 크게 들고 신나게 춤춰야지.
좋아하는 커피도 그냥 마시지 말고,
바리스타 자격증 공부를 해봐야겠다.
적어만 둔 영화리스트들은 언제 볼까.
기침으로 질식할 것 같은 순간에도 계속 떠올랐다.
별 의미없이 지나갔던 모든 것들.
내가 보았던 풍경들.
내 손을 잡아줬던 고마운 사람들. 모두.
순간순간 별 것 아닌 모든 것들이 빛나보였다.
난 죽어도 여전히, 여한이 남아있겠구나.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기침이 수그러들고
내 목소리가 그럭저럭 나올 무렵
여태껏 생각했던 모든 걸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모두 이루었다.
친구들과 신나게 스키도 타고
워터파크에도 가고 남산타워에 올라가기도 하고,
제주도에도 놀러가고 강릉도 가고.
참, 춤도 췄다. 노래를 아주 크게 틀고.
춤치에게도 희망을 주신 댄스 선생님 고맙습니다.
바리스타 자격증 클래스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원두의
어떤 느낌의 커피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난 당당하게 카라멜 마끼아토와
바닐라 라테를 얘기하기도 하고.
돗자리에 앉아 여의도 불꽃축제도 보았다.
물론 벚꽃축제도 잊지 않았다.
또, 친구와 롯데월드 오픈 시간에 들어가서
로티와 로리가 다시 나와 인사할 때까지
놀이기구도 탔다.
누군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시간들이
나에겐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들로 다가올 때가 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
모든 걸 이루고 나니
마치 대충 그리고 넘어간 내 인생을 되짚어가며
색칠한 기분이었다.
그럼 아직도 여한이 있어?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 있어요.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다.
어쩌면 죽어서 여한이 없기란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가지 바라는 건,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별들,
그 사이로 행복했던 시간들을 잊지 말기.
매 순간이 소중한 걸 잊지 말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내 인생에 색칠하는 걸 잊지 말기.
저멀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우주에서도
빛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