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나 엄마의 역할을 다 하고 나서
2화. 대단하고 신기한 남의 이야기.
영국 석사 과정 지원 후 최종 합격 소식을 받아 들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작년 늦봄, 한국의 코로나 상황은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이었으나, 비교적 늦게 코로나가 시작된 유럽의 상황은 매우 나빳다. 작년 5월, 영국은 이탈리아를 제치고 유럽 내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던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한치 앞을 알 수 없었다. 첫 학기는 비 대면 온라인으로 시작하겠지만, 그 다음 학기인 2, 3학기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회사가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고 추가 휴직을 권했던 만큼 지금 아니면 복직을 앞 둔 두 살아기의 예비 워킹맘이 공부를 위해 시간을 할애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고민 끝에 이제부터는 공부할 동안 신랑이 주 양육자가 되어 주길 바라며 아빠 육아 휴직을 요청했다. 신랑도 지난 십 수년 간의 회사 생활에 아이까지 태어나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라 내심 휴직을 바라는 눈치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며칠 후 회사에서 삼 개월 육아 휴직을 승인 받았으니 걱정 말고 공부를 시작하라고 응원해주었다. 그 이후는? 이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게 어디야 싶어 고맙다 했다. 부부간의 합의는 마쳤으니, 이제 가족들에게 알릴 차례였다.
시댁에서는 남자도 하기 힘든 걸 여자가 외국에서 공부를 한다니 대단하다고 하셨다. 시골에서만 쭉 지내오신 분 들이라 웃으며 네 하고 넘겼다. 친정 엄마는 그래, 아무 생각 말고 신랑 있으니 공부 잘 해 보라고 하셨다. 이후 서류 제출, 신체검사, 비자 수속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세를 몰아 은행을 찾아가 눈 딱 감고 학비를 전액 영국으로 송금했다. 결혼으로 인해 매몰된 나의 피 같은 돈 삼천만 원은 이렇게 쥐어짜내고 나서야 다시 세상에 나왔다. 본래 목적에 맞게 소비를 달성하고 나니 시원섭섭한 기분 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돈이면 우리 가족과 내 아이에게 더욱 가치 있는 소비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을지 씁쓸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모든 면에서 나 자신보다는 아이가 우선이 된 것이 당연했는데 이렇게 내가 주인공인 이벤트를 진행 하자니 나는 새삼 어쩔 줄을 몰랐다.
신랑의 육아 휴직이 시작되고 우리 가족은 새로 다가올 변화에 대해 꿈에 부풀어 있었다. 9월,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다. 교수진과 학생 모두가 참여하여 자기소개 및 사전 질문에 대해 서로 생각을 공유하는 자리로 온라인 줌을 통해 두 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코시국에 시작한 영국 석사 과정은 내가 그리던 것 과는 여러모로 다른 모습이었다.
<코시국 영국 석사 과정 시작 후 알게 된 점>
1. 코로나 특수 상황을 참작하여 영국 이민국은 학생 비자의 입국 기한을 연장할 수 있는 방안을 허용하였고 학교에서도 최대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고 영국 입국을 늦추길 권장함.
2. 코시국으로 인해 석사 과정에 통상 학생 수의 1/3 수준인 21명만이 시작하였다.
3. 학생의 국적은 다양하나 중국 유학생의 비중이 확연히 줄어 21명 중 영국 및 유러피안 학생이 70% 가량, 나머지는 기타 미국 및 아시아 유학생이었다.
4. 교수진과 부교수진 모두 자택에서 비 대면 온라인으로 강의에 참여 하였다.
5. 수업 자료, 전공 서적 및 연구 자료는 모두 온라인 도서관을 통해 열람할 수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주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1학기가 시작 되었다. 총 3학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처음 1학기는 전 과목 수업 과정으로 되어있다. 1학기는 월, 화, 목, 금 주4일간 한국 시간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이 진행되었다. 처음 한 시간은 교수진 강의, 다음 두 시간은 워크샾, 마지막 시간은 개별 공부 시간 이었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내 마음만 앞서가고 그간 임신, 출산으로 돌보지 못한 내 몸은 하나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틀어진 골반과 꼬리뼈 통증으로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겨웠다. 그리고 단순, 반복 적인 생활로 굳어진 뇌로 인해 긴 문장을 읽는 것 자체가 눈앞이 깜깜했으며 게다가 우리나라 말도 아닌 영어 였다. 남편이 육아 휴직은 했으나 아이가 태어나고 그간 주 양육자는 나였으므로 갑자기 역할이 전환 되기는 어려웠다. 마치 혼자 하던 육아를 그저 둘이 같이 하는 느낌. 물론 더 수월했지만 나는 내 시간이 절실했다. 동네 학원을 다녀도 수업 시간 전후로 예습 복습 할 시간이 필요치 않은가! 나는 아기가 일어나는 아침 7시부터 밥 세 번, 간식 두 번을 차려내고 나서야 저녁 6시 1분전에 겨우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또한, 수업 시간 내내 아기가 공부방을 수시로 열고, 문을 쾅쾅 두드리고 노트북 전원을 수시로 껐다. 한 학기가 12주 인데 어느덧 어영부영 2주의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는 도저히 안되는 일 이었다.
신랑에게 더욱 독립적인 주 양육자의 역할을 요청하였지만 신랑도 한계가 있다며 아기 삼시 세 끼 밥 해 먹이기 등은 엄마의 역할을 하길 바랬고 나는 온전히 집중 할 수 있는 연속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현실은 학생의 기본 시간조차 가질 수 없으니 내 자신에게 실망만 쌓여 갔다. 이로 인해 신랑과 점점 육아로 인한 다툼도 늘어났다. 친정 엄마께 속상한 마음에 푸념을 했지만 그러게 왜 나이 먹어 공부를 한다고 해서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냐 는 핀잔이 돌아왔다. 점점 시간만 가고 예, 복습할 자료들이 쌓여갔다. 그 때 깨닳 았다.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내가 두 살 아기의 엄마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 내 자아실현을 운운하길 바란다는 것을 말이다. 두 살 아기의 엄마는 누구보다 잘 해내겠다는 그런 결심을 해서는 안되는 것을. 영국 석사 과정은 그저 대단하고 신기한 남의 이야기 인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