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되찾은 나
6화. 영혼의 충전소
런던에 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나름의 루틴이 생겨 새벽 6시 기상 후 아기와 화상 통화, 이후 아침을 차려 먹고, 9시 수업 준비, 종료 후 1시에 외출을 하여 6-7시에는 귀가하여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자기 전 두시간 공부를 한다. 어떤 이에게는 보통의 일상처럼 보이겠으나, 두 살 아기 엄마인 나에게는 꿈 같은 매일 이었다.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것은 낯선 런던의 풍경도 아니고 유럽인들도 아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나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아프면 안되니) 손수 내 아침을 차려먹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에 정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저녁에는 욕조에서 목욕을 하며 나를 돌보는 일 이었다.
커피 한잔의 여유와 잔잔한 클래식 음악.. 내가 이런 호사를 다 누려도 되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했으며 내가 언제 아이를 낳았나 싶었다. 이렇게 코시국 런던은 내 영혼의 충전소가 되어 주었다. 엄마가 되어 지친 나를 위로해주었고 쉬어가며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주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끊어내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야 나를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감수하고 어렵게 잡은 기회였고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 했다. 논문 주제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직 들은 수업도 몇 과목 안되고 리포트 쓰기도 힘겨운데 내가 과연 오십 여장의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의구심이 앞섰다. 며칠 간 외출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해보며 논문 주제를 정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나만의 기준을 생각해 보았다.
<논문주제 결정을 위해 고려할 점>
1. 전공 분야, 혹은 관련 경력에서 의문을 가졌던 부분에 대해 파고들어 볼 것
2.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기회에 대해 생각해볼 것
3. 주어진 시간과 자원 내에서 탐구할 수 있는 주제와 목표를 정할 것
4. 연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것과 그 수혜자가 누군지 목표를 정할 것
위 내용을 바탕으로 주제에 대하여 큰 틀이 결정되고 나자 관련 문헌 조사로 자연스레 연결이 되었다. 2학기의 마지막 과목은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는데, 먼저 생각하는 논문 주제에 대하여 네 명의 교수 님과 매주 차례로 줌 미팅을 통하여 주제를 좁히고 보완해 나가며 논문 계획서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후 완성된 논문 계획서를 10분간 발표하고 이에 대한 교수 님의 질의 응답 시간을 가진다. 나는 큰 틀은 정했으나 세부 내용을 확정하기 위해 몇 주간의 노력을 쏟아 부었고 마침내 만족스러운 주제를 정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렇게 주제를 정하기까지 나는 틈틈이 거리로 나가 런던을 활보하며 끊임없이 브레인 스토밍을 하고 저녁에는 아이디어들을 정리했다. 코시국에 새롭게 만난 런던 곳곳에서는 생존을 위한 아이디어들이 넘쳐났다. 또한, 디자인 업계는 틈틈이 웨비나 등을 개최하여 새롭게 바뀐 사회, 문화, 기회에 대하여 토론하고, 또 미래를 예측하며 소통의 끈을 이어나가려 노력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시차도 다르고 멀게 느껴졌는데 런던에 있으니 비록 온라인이지만 실시간 웨비나 참여가 편안했고 사례로 나온 장소 등은 바로 가볼 수 있어 좋았다. 궁금한 내용은 교수님 들과 소통하여 추가로 정보를 얻고, 동기들과도 자주 만나 토론하는 등 런던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보고 듣고 느꼈다.
이후 지도 교수 님이 정해지고 일주일에 한번 줌 미팅을 시작하였다. 깐깐한 호랑이 스타일의 가장 연장자 교수님 이어서 사뭇 긴장했는데 런던에서 디자인 주역으로써 일궈온 앞선 세대의 경험을 충분히 공유 해 주셨고 무엇보다 디자인 현업에서 내가 의문을 가졌던 상황들에 대하며 편안히 대화할 수 있어 좋았다. 한 주간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매주 줌으로 만나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질의 응답을 가졌는데, 이를 준비하는 시간이 매우 고통스러우면서도 미팅을 하고 나면 아 역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이런 철저한 자기 주도적 학습 방식이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서서히 그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인생에 어떠한 주제를 이리도 치밀하게 파고든 적이 있던가? 비록 논문 집필을 위한 과정이었지만 이것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또 한번 성장해 있으리라 는 확신이 들었다. 런던에서 남은 시간이 보름 정도 였지만 나는 무조건 나가 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하루는 문헌 조사에 매진하고 다음날은 궁금한 것을 직접 가보고, 또 친구들과 같이 궁금했던곳을 가보는 등 목적 있는 외출을 했다. 돌이켜보면 처음 런던에 기대하고 온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육아 전선에 바로 투입될 것을 알기에 나머지 시간은 나의 내면을 돌아보고 독서를 하는 등 나와의 시간에도 꽤 집중 했다.
마지막 일주일은 사람들을 만나 작별의 인사를 하고 가족을 위해 작은 선물들을 준비하며 조용히 귀국 준비를 했다. 귀국 일이 가까워지자 아기가 보고 싶어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런던에서 온전히 나를 돌본 8주의 시간 동안 방전에 가까웠던 내 영혼은 충전되었고 자기 주도적인 시간을 살아가며 나 자신을 되찾았고 이제 미래를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나는 다시 인천 행 비행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