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보유 유자녀 여성이 된 후
8화.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 길
아이 돌봄 도움이 절실해졌다. 이를 구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옵션이 있었다. 가장 안전하고 쉬운 첫 번째 방법은 현재 어린이집 하원 시간을 늦추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모두 4시면 하원을 했고 어린이집에서도 오후 5시까지는 돌봄이 가능하나 이후 하원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포기했다. 두 번째 옵션은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아이 돌봄 도우미 신청이었다. 대기를 올리고 몇 주를 기다렸지만 매칭이 가능한 아이 돌봄 인력이 없다고했다. YMCA도 마찬가지 였다. 이후 사설 기관 구인공고, 아파트 게시판에 전단지 부착, 시터구인앱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총 동원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너무나 망설여 졌지만 논문 제출 기한은 다가오고 있고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닥치는 대로 면접을 봤으나 내가 원해도 상대방에서 코로나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등 잘 풀리지 않았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구인 기간 중에는 신랑이 저녁에 돌아오면 나는 바로 스터디까페로 가서 밤늦게까지 논문을 쓰고 자정 무렵 집에 들어왔다. 신랑도 회사 일로 힘든데 집에 와서 혼자 아이를 케어하려니 힘들었는지 데드라인이 정해진 일 이란 것을 알면서도 말이 좋게 나오지 않았다. 나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에 한껏 예민해져 서로 다투는 일이 잦았고 나는 점점 서운함이 쌓여 고드름처럼 맺혀 갔다. 학생으로서 한 달여 남은 시간 공부에 집중하고 싶은 것이 마치 큰 욕심을 부리는 것 같은 현실에 서운한 마음이 컸고 속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군데서 전화가 왔는데 무려 같은 아파트, 그것도 같은 동에 사시는 이모님께서 베이비시터로 지원을 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동아줄을 내려 준 것 같았다. 백신 접종까지 마치셨고, 출퇴근 동선이 없었기에 다행이었고 곧바로 돌봄을 시작하였다. 주5일간 오후 4시부터 신랑이 퇴근해 오는 저녁 8시 까지 돌봄을 부탁 드렸고 아기나 나와 이모님과 함께 몇 일간의 적응 시간을 마쳤다. 이제 논문 제출까지 남은 기한은 딱 한 달 이었다. 나는 집 근처 스터디까페에 한 달 이용권을 끊고 그곳에서 논문을 쓰기로 했다. 집에서는 아기가 수시로 내 공부방으로 와서 훼방을 놓기에 나와야만 했다. 런던에서 돌아와 두 달의 기간 동안 나는 다시 엄마로서 주 양육자의 삶에 적응하고 양육 시간 중 4시간을 아웃소싱 하기 위해 알아보고 다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다시 세팅하기까지 꼬박 두 달의 시간이 걸렸다. 남편의 육아 휴직이 그간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었는지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그 후로 약 2주간은 나도, 아기도, 신랑도, 베이비시터도 각자 맡은 시간에 양육을 하고 나는 나머지 시간에 최대한 논문을 쓰는 스케줄에 익숙해져 갔다. 그 사이 나는 필드로 나가 조사도 진행하고, 영국과 벨기에에 있는 전문가들과 화상 인터뷰를 하는 등 그간 제약이 있어 못했던 연구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나도 처음 겪는 과정이었고 혼자 진행하는 것이었기에 계획에 비해 현실의 진도는 거북이처럼 느렸다. 그리고 슬슬 졸업 이후에 상황에 대해서도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학업이 끝난 이후에는 곧바로 복직을 할 것 인지 추가로 휴직을 할 것 인지 아니면 학업과 좀 더 관련한 분야로 이직을 할 것 인지, 이제는 사업을 시작해야 할 때는 아닌지 결정의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고민이 점점 깊어졌다.
회사와 약속한 휴직의 시간이 거의 다했기에 고민 끝에 부서 장님을 찾아뵙기로 약속을 하고 2년여만에 회사를 방문 했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이후 추가로 회사에서 권한 유급 휴직 등이 합쳐서 2년여의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지난 8년간 가깝게 지냈던 동료들, 상사분들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고 늘 고마운 마음이 컸다. 찾아 뵙고 추가로 두 달 정도 무급 휴직을 요청 해 보거나, 안되면 잔여 연차를 소진하며 논문 완료 후 복직 할 생각 혹은 퇴사의 가능성 등 의논 거리를 가득 안고 회사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간 회사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고 사람들도 그대로 였으며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2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아이가 있기 전과 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렇게 변하지 않은 것을 보니 내가 이상한가 아님 여기가 이상한가 전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 이었다. 부서 장 님은 회사에서 어려운 시기임에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시급히 복직을 하길 바라셨고 급한 성격에 마주 앉자마자 프로젝트에 대한 진행 상황 브리핑을 시작 하셨다. 두 시간의 미팅을 마치고 나는 조심스레 정말 죄송하지만 아직 복직을 원하지 않는다고 또 복직해도 이전처럼 풀타임으로 일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씀 드렸다.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거짓말로 ‘네, 이전처럼 모든 것을 바쳐 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업의 특성 상 최소 2년 이상 진행 할 프로젝트이고 팀워크가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시작해서 제대로 하던지, 아니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이틀 간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집에 돌아 왔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 이었다. 대학 졸업 후 쉬지 않고 한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아 왔고 워커홀릭 수준이었으며 출산 직전까지도 현장을 지키며 열정을 불태웠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때와 많이 달라졌고 생각 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2년간 생각 안하고 뭐했냐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내 인생에 임신, 출산을 거쳐 엄마가 된 것은 인생에서 겪은 가장 변화무쌍한 일 이었기에 내 삶의 워라밸에 대해서 또 유 자녀 경력 직 여성의 삶에 대해 생각 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자이지만 남자처럼 일했고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현실은 회사에 롤 모델 이라고는 싱글 여성 임원 한 분이 전부 였다. 의논할 곳이 없었고 마음이 시베리아보다 더 추웠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이고, 나와 가족을 사랑하기에 나 자신을 지키면서 열정적으로 일 할 방법을 다시 생각해보고 새로운 합의가 필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