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 중 ‘사‘
오늘 이야기는 거창한 꿈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말하기 싫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한 번 꺼내보려 한다. 지겨움이 귀찮음이 되고, 귀찮음이 나태로 이어진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 나는 이것 또한 사랑일까 하는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나무 향이 펑펑 터지는 방 안에서, 여기가 자연이고 숲이라며 기름을 축적하려는 목적으로 바지만 입은 채 장판에 누워버리는 게 과연 사랑이냐는 말이다.
오랜만이다. 그간 잘 살아오자 했던 순간들 사이에서조차, 어쩌면 잠시 쉬고 있자는 행동이었을 테지만, ‘사’라는 것이 입을 열어 꾸릿한 냄새와 함께 나태를 맡아주는 것이었다. 뇌의 뒷부분이 엉엉 부어오를 때면 허공에 손을 뻗어 공기를 쥐어 올리면서 일어나곤, 오직 침침한 빛만이 유일하게 내리쬐는 책상에 앉았다.
단어를 쪼개는 버릇이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요즘 빠져 있는 단어는 사 그리고 랑. 이유는 간단하다. 하트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사랑은 구가될 때까지 끌어안는 거라 하고, 다른 누구는 형태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진정한 의미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구가될 때까지 안으며 떨어져 나간 그 잔가시들이 몸에 박히는 고통을 즐기라는 것인가, 아니면 맞지 않는 것들에 대해 둥글둥글하게 닮아가라는 것인가. 아니, 사와 랑은 어쩌면 서로 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묘한 거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일단 어두의 자리를 잽싸게 잡아버린 사에게 물어보자. ‘사’란 무엇일까. 사랑해, 사귀자, 사실... 이렇게 첫 시작의 단어는 긍정을 뜻하거나, 무언가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나에게 긍정과 흥미는 무엇일까. 아마 이상향적으로 생각해 둔 목표가 아닐까 싶다. 내 목표를 말하자면, 나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드는 것이다. 독특하거나 새로운 시각을 통해 ‘미상스럽다’라는 말이 나오게 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 목표에 영향을 준 사람은 작가이자 건축가인 이타미 준이다. 최근 그의 미술관인 유동룡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역시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고 싶다는 말과 함께 생전 썼던 붓과 안경 등을 함께 전시했다.
신기했다. 그 당시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생각해 낸 건축 도면에서부터 그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타미 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플라시보 효과일까. 그가 썼던 붓이나 안경조차 고뇌가 짜낸 땀 냄새가 더러 풍기는 듯했고, 수많은 생각의 떼가 묻은 붓 모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더 깊이 그를 이해하려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얼마나 이해하려 했냐면, 미술관을 시끄럽게 전화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조차 이타미 준의 계획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이 모순이 진실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어부부, 그건 너무했다"라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침방울을 뱉어내며 애써 그 감정을 털어냈다.
대단하지 않나? 그가 그린 건축도 하나에 홀딱 반해 이타미 준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그가 건축한 사진 앨범과 미술관에 뿌린 자체 제작한 향수까지 사버린 것이다. 그 향수를 맡을 때면 더러 나의 장르가 무언인가 생각해 냈고, 그가 건축한 사진을 볼 때면 어떻게 만들어나갈지는 생각했다.
이토록 ‘사’는 그저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희망이고, 일련의 목표이며,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게 하는 삶의 긍정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