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에서 만난 일본인들과 모래벼룩 소동
히로키의 고향은 규슈의 출신으로 대학교까지 규슈에서 나왔다고 했다. 자이카(JICA)를 통해 처음으로 해외에 나온 셈인데 "일본에도 좋은 곳이 많다"며 자기는 국내 여행을 많이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래는 남태평양이나 남미 쪽으로 봉사활동을 가고 싶었는데,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를 우간다로 보냈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히로키는 나를 키무(Kim)로 불렀고 나를 비롯한 한국인 봉사자들은 "히로키 상"으로 불렀다. 나중에 일본어에 관심이 생겨 공부를 해보니 "히로키 상"이라고 부른 건 잘못된 호칭이었는데, 어쩐지 히로키는 이를 한번도 정정한 적이 없었다. 대신 자기 성이 싫다며 히로키로 불리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치왕갈라의 생활은 단조로웠고 널널하게만 보이던 학교 근무도 실은 전혀 널널하지 않았다. 아침 7시면 아이들이 등교해서 학교 청소를 하고 7시 30분이면 수업이 시작되는데, 잠을 더 자고 싶어도 시끄러워서 더 잘 수도 없었다. 캄팔라 UPA 숙소에서 지내며 학교에서 근무하는 봉사자들은 자신의 수업이 있는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면 됐지만 나는 솔거노비 아닌 솔거노비가 되어 학교의 24시간과 함께 해야했다.
어릴 적 외할머니의 잔소리-"해가 똥구녕에 비쳤는디 안 일어나고 자빠져 있어야?"-에 단련돼 실제로 아침 잠이 적은 편인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과 함께 학교 청소를 하고 내 수업이 아닌 수업에도 들어가서 청강했다. 학교가 끝나는 오후 2~3시가 돼서야 비로소 내 시간이 시작됐는데, 교사회의가 있으면 오후 5시가 넘어서 끝나기도 했다. 퇴근 후 내 전화를 안받는 물장수 아저씨를 마을을 뒤져서 찾아내고, 주유소에 가솔린이 다 떨어져서 주유차를 기다리기라도 할라치면 어느덧 해가 지고야 마는 것이었다. 평일은 몸이 고단했고 주말에는 너무나 할일이 없었다.
히로키는 금요일 아침이면 캄팔라로 떠났기에 주말에 그를 치왕갈라에서 보는 일은 흔치 않았다. 주말에 캄팔라에 안가고 치왕갈라 숙소에서 지낼 때면 요리를 만들어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옆방에 사는 한국인 봉사자를 위해 나름의 친절을 베푼 것이었던 듯한데, 당시에는 '왜 맛없는 걸 만들어서 주는 거야'하는 철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초대했으면 그 사람이 평소에 먹기 힘든 음식이나 맛있는 음식을 주는 게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에 초대했을 때는 크림스파게티, 샐러드 등을 주더니, 나중에 토마토와 양배추를 같이 끓인 국적불명의 음식을 내놓을 때는 숟가락을 던질 뻔했다. 히로키는 처음에는 대화를 많이 했는데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이에 대해 한국인 봉사자 h오빠에게 말하니 "영어를 잘못하는데 처음에 말을 많이해서 밑천이 다 떨어진 듯"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마사카에 있는 자이카 봉사자들의 모임에 나를 데려가주기도 했다. 처음으로 그 모임에 참석한 건 내가 치왕갈라에 온지 한달이 채 안됐을 때였다. 방문을 연 채 바닥에 앉아 발톱을 깎던 히로키는 방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만지작 거리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키무, 토요일에 마사카 시내에서 자이카 모임이 있는데, 거기 가보지 않을래?"라고 물었다. 마침 주말에 뭐하지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생각한 나는 흔쾌히 "예스!"라고 답했고, 발톱 깎던 그는 나를 쳐다보며 "Okay, we go"라고 말했다. 내가 열쇠로 내 방문을 열자 그는 "요시!"라고 외치며 자기 방문을 닫았다. 치왕갈라-마사카 간 흙길을 히로키의 야마하 오토바이로 40분 가량 달려서 도착한 마사카 시내의 10 Tables 2층에 올라가니 15명 남짓한 일본인 봉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히로키와 나에게 "오다 order"하라며 메뉴판을 내밀었다.
당시 외모에 민감한 편이었던 나는 봉사자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외모 품평회를 시작했다. 어느 집단에 가든지 그 집단을 대표하는 얼짱들이 있다고 믿어왔던 내 신념에 걸맞게 과연 거기에는 정말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와, 잘생겼다' 생각하는 동시에 '왜 이런 사람이 치왕갈라에 안오고...'라는 원망도 들었다. 마사카 전체 자이카 봉사자들 중에서도 히로키는 잘 생기지 않은 편이었던 것이다. 지금에야 내 주제를 알고 얼평을 삼가하지만 당시에는 외모 컴플렉스도 심해서 남 얼평도 자주 했던 나였다.
모임의 뉴페이스인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이 쏟아졌는데 내가 짧디 짧은 일본어로 "곤니치와, 와따시와 키무데쓰"라고 하자 모두들 "에~"하며, 일본어를 잘한다는 가당찮은 칭찬을 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나와 히로키를 쳐다보며 "간지가~에~"하더니, 히로키는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나는 이게 무슨 간진가 싶어 히로키를 쳐다보며 물었는데 웃기만 할 뿐 대답을 안했다. 테이블 상석에 앉은, 베레모를 쓴 남자 봉사자가 나에게 물었다. "키무상, 일본 배우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있어?" 나는 당연히 오다기리 죠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 놀랍다는 반응이었고, 베레모를 쓴 남자는 "키무상이 좋아하는 오다기리 죠가 여기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Where?"라고 물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고, 이런 내 반응이 그들의 웃음코드와 맞았는지 다함께 웃었다.
점심인데도 그들은 다들 나일(NILE) 맥주를 한병씩 들고 있었고 반주가 익숙치 않았던 나는 그 광경이 신기해보였다. 한병만 마시고 더 이상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휘시앤칩스를 시켰고 스토니를 마셨다. 대부분 우간다에 온 지 1년이 넘은 사람들이었고, 그 잘생긴 남자는 나처럼 온 지 얼마 안된 봉사자였다. '그래, 우린 이미 공통점이 있어'라며 그 남자와 나 사이의 어떤 다리를 이어보는 상상을 하다가, 그 남자와 옆에 앉은 안경 쓴 여자가 장난치는 것을 보고 마음을 조용히 접었다.
나는 남의 연애에 대한 촉이 좋은 편인데, 둘이서 장난치는 것만 보고도 훗날을 예감했고 실제로 이 둘은 나중에 사겼다. 나는 내 옆자리에 앉은 여성 봉사자와 함께 예전에 서로의 국가에 여행 갔던 일, 좋아하는 음식 등에 대한 일반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점원들이 그릇을 모두 치운 후 다들 화장실에 가거나 담배 피우러 밖에 나갔고, 나를 비롯한 자이카 봉사자 몇명이 테이블을 지키고 있었다.
베레모를 쓴 봉사자가 일본어로 말하자 다른 봉사자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가 갑자기 양말을 벗어서 발을 내보이고 있었다. 뭐지 싶어서 나도 다가갔는데, 알고보니 모래벼룩이 그의 발에 알을 낳은 걸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세상에 이런 일이'하는 표정을 지었고, 베레모 쓴 남자는 다른 봉사자들에게 "꼭 운동화를 신어라"고 말해주었다. 그 뒤로 나도 양말 신은 발로 크록스를 신고 돌아다니다 모래벼룩에 쏘여 그들의 알을 내 발바닥에 품었는데, 모래벼룩에 쏘이면 따끔 하는 통증이 잠깐 있을 뿐 별 이상이 없다. 그러다가 그 알이 커질 때 쯤이면 알을 놓은 부분이 붓고 가려워지는데 이때 바늘로 조심히 알을 꺼내지 않으면, 벌레가 내 몸속에서 부화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는 자연의 신비를 실사판으로 볼 수 있다. 만약에 알을 꺼낼 때 실수로 터뜨리면 그 알덩어리가 깨져서 엉망이 된다는데, 다행히 그런 불행은 겪어보지 못했다.
일본인은 이렇다, 저렇다를 하도 많이 들어본 나로서는 우간다에서 만난 일본인들을 통해 그러한 편견을 없앨 수 있었다. 다테마에니 혼네니 하는 것들은 한국으로 쳐도 겉마음 속마음 정도로 생각됐고, 머나먼 타향에서 본토 사람 만나서 몰려다니는 것 또한 집단주의라기 보다는 인간의 당연한 속성 쯤으로 여겨졌다. 봉사활동이 끝나고 우간다에서 일을 할 때도 자이카 단원들과 교류를 이어갔는데, 내가 만난 일본인들은 그렇게 차갑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기 보다는 친절하고 속 깊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예전에 국제워크캠프를 통해 우간다를 다녀온 어떤 이의 후기에서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다"고 쓰여있었던 것처럼, 그 시절 모두 젊고 순수했던 우리들은 모두가 좋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