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글로 써내는 일은 기억 한 켠에 수납된 빛 바랜 앨범을 열어보는 일과 같았다. 우간다 봉사활동은 단순한 스펙을 넘어 내 인생의 행로를 바꾼 중요한 순간이었다. 봉사활동 이후 한국에 가면 이러겠다 저러겠다 수많은 다짐을 했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우간다에서 있었던 일들이 꿈결처럼 아련했다. 우간다에서 만난 친구들과 가끔 만나 우간다를 추억하며 떠드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이 되어버렸다. 내가 지금 서 있는 바로 이곳에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꾸만 마음은 우간다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우간다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고, 그 시절 그 친구들이 없는 그곳에서 나는 여행자와 생활인의 경계를 넘으며, 봉사활동 시절 가졌던 우간다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다. 봉사자의 신분을 벗어나니 그냥 아시아계 이주 노동자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졸업하기까지 1학기를 남겨두고 또 다시 휴학하여 “우간다 사람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그 마음만으로 이력서도 계약서도 필요없이 노동과 금전의 교환만 있는 곳에서 2년을 보냈다. 세일즈맨부터 테크니션, 운전기사 심지어 청소부에 이르기까지 부패가 만연한 그곳에서 각종 절도나 사기를 잡아내는 것이 업무 중 하나였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을 지옥도로 기억하지만 그 안에서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즐거운 일도 많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계획한 2년을 채우고도 졸업 후 약 1년가량 더 일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내가 나서서 사람과 관계 맺기를 적극적으로 하진 않지만 이미 맺어진 관계에 대해서는 이상스러울 만치 충성을 다하는 것이 바로 나였다.
한국에서 학보사로, 알바로 잔뼈가 굵은 나였지만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통한 밥벌이는 우간다가 처음이었기에, 열악한 업무환경에서도 인내하고 살아내지 않았나 싶다. 내 인생을 통틀어 그때가 가장 많이 인내했던 시기로 기억될 정도로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NGO 활동이었지만 내 전공이나 장래와 상관없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면서도 그것이 전혀 쓸모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영리의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평범한 우간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자기 자리를 지켜오진 않았으나, 각각 전혀 다른 위치를 오가며 한 경험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때의 경험이 있어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겼고, 각종 변수와 재해로부터 초연한 마음가짐이 생겼다. 그리고 그때 내 인내의 임계점이 확정되어 조금만 유사한 조짐이 보여도 바로 박차고 일어나는 순발력을 갖게 됐다.
돈을 쓰기 위한 체류에서 돈을 벌기 위한 체류로, 체류의 목적이 바뀌자 그전과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제거한 채 가장 이상적인 이미지만을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엄청난 재력을 가진 우간다인들은 왜 가난한 우간다인들을 스스로 돕지 않는가. 왜 측은지심은 외국인들만의 몫인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는 가운데, 외부 세계로부터 차별 받는 이들의 집단 내부에서도 상위집단과 하위집단이 존재함을 알게 됐다. 흔히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피부색 차별은, 흑인 중에서도 더 밝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더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람에게 가하는 멸시로 변모했다. 우간다 사람이 우간다에서 가장 가난한 부족인 카라모종(Karamojong)을 미개하다고 천대하는 모습은 아프리카를 시궁창이라고 말하는 외부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간다가 좋아서 돌아온 우간다에서 정작 친구가 되었던 사람들은 인도인이나 파키스탄인, 중국인 등 나와 같은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공금을 횡령하고 고국으로 도망가기 직전에 나에게 돈을 빌려서 뒷통수 치려 했던 친구, 돈 벌어서 죽으면 뭐 할 거냐며 계산은 무조건 나에게 미뤘던 친구, 스킨십을 자꾸 시도해 만지지 말라고 했더니 “너는 안젤리나 졸리가 아니야”라고 했던 친구, 나를 무슬림으로 만들고자 자꾸만 코란 구절을 따라 읽게 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좋은 친구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컷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일들이 더 많았다. 그들보다 더 잘난 것도 없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말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으니 나 또한 피부색의 이점을 취했다고 볼 수 있었다.
어쨌든 끝내 우간다를 떠났고 여러 나라들을 거쳐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게 됐지만 아직까지 우간다 봉사활동이 잊혀지지 않는 건 첫사랑의 기억처럼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짧지만 강렬했던 봉사활동의 기억을 소환하여 글을 써내려 가며 지금은 꼰대가 된 개구리의 올챙이 시절을 보았고, 때로는 부끄러움에 때로는 그리움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억들이 담긴 앨범을 잘 정돈하여 먼지가 닿지 않는 깨끗한 선반에 꽂아 두고 먼 훗날 다시 열어보고자 한다. 나의 우간다 봉사활동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