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어머니는 마을에서 성매매를 하고 있어

우간다 마사카 치왕갈라 마을 가정방문 이야기

by 만다지
69875090_2410525652363598_9422599901675520_n.jpg 2009년 커뮤니티 아웃리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문한 티모시(왼쪽에서 세번째)의 집 마당에 앉아 찍은 사진


우간다 봉사활동 기간 중 가장 즐거웠던 프로그램은 커뮤니티 아웃리치(Community outreach)였는데, 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들 중에서 가정형편이 많이 어려워서 후원이 필요한 아이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그 아이들의 프로필을 작성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아이의 생활환경을 관찰하기 위해 방과 후 학교 선생님들끼리 조를 구성하여 3인 1조 또는 4인 1조로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치왕갈라 마을 곳곳을 누비었던 기억은 정말 상쾌하고 경쾌했다.


당시 학교에 근무하는 사람 중에 카메라를 가진 사람은 나, 카잉가, 히로키 뿐이었고, 카잉가의 카메라는 상태가 많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야 할 때면 으레 나와 히로키가 차출돼 각자의 카메라가 가진 기량을 뽐내야 해서 2개 조로 나뉘면 나와 히로키는 서로 다른 조로 갔다. 히로키는 자이카에서 지급한 엄청 좋은 오토바이(YAMAHA)가 있었는데 주로 학교 선생님들을 마을로 태워다주거나 마사카 시내에 갔다오거나 할 때 사용했다. 아이들의 집 위치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가야했기 때문에 오토바이보다는 도보가 더 편리했다. 아이들의 집이 어느 방향에 있다는 것만 대강 아이들에게 듣고 나서 그 방향으로 걷다가 만난 사람들에게 아이의 부모님 이름을 대면, 누구 하나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 또 다시 걷다가 멈추어 또 묻고 또 걷고 또 묻고 또 걸었다.


아이들이 정말로 먼 길을 걸어서 집과 학교를 오가고 있었다. 평소 내가 파악한 치왕갈라는 숙소가 위치한 학교 컴파운드에서 마을 상점들을 가로질러 주유소까지였는데, 끝도 없이 걷고 걸어 바나나숲, 카사바 밭을 지나 또 계속 걸어도 치왕갈라였다. 초등학교 때 왕복 1시간을 걸어서 집과 학교를 오고 갔던터라 10명이 전부인 우리 반에서 내가 가장 많이 걷는 아이였고, 커서도 걷는 게 습관이 돼서 되도록이면 걸어서 이동할 정도로 걷는데는 일가견이 있었던 나도 쉽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의 집은 정말 멀고도 멀었다. 마을의 중심가는 마사카 시내를 오고가는 버스나 택시가 멈추는 Stage 근처인데, 이 스테이지에서 멀어질 수록 아이들의 가정이 가진 부의 총량도 줄어드는 것이었다.


삼촌 집에서 살며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아이, 눈이 먼 홀어머니가 재봉틀을 굴려 번 돈으로 살아가는 아이, 에이즈에 걸린 어머니와 바나나 나무로 엮은 집에서 살아가는 에이즈에 걸린 아이, 돈을 벌러 캄팔라로 간 부모님 대신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 많은 아이들이 아이답지 못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있었지만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어떻게든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몇 시간을 걸어 아이들의 집에 도착하면 먼 길을 걸어온 손님들을 위해 돗자리를 마당에 깔아주었다. 다 헤져서 너덜너덜해진 돗자리는 여기저기 성한데가 없었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그 마음만큼은 따스하고 정갈했다.


우간다나 다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손님을 맞이했을 때 집주인이 손님에게 제공하는 '앉을 자리"를 통해 그 가정의 살림 형편이나 집주인과 손님 간의 거리에 대해 가늠해 볼 수 있다. 마당에 돗자리를 까는 가정이 일반적인데 플라스틱 의자를 마당에 내어주는 가정은 부유한 편으로 짐작해도 놓다. 또한 집안으로 들이는 경우는 어김없이 소파가 있어서 소파에 앉게 하는데, 이 경우는 타인을 집안에 들일 정도로 경계심이 덜한 사이거나 타인이 중요한 손님이라는 것 그리고 집에 소파가 있다는 건 꽤 부유한 가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이들의 집에 도착하면 돗자리에 앉아 아이의 보호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루간다를 못하는 나는 옆에서 영어로 설명해주는 시자(Caesar)의 도움으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화가 끝나고 나에게도 질문이 있는지 묻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대학이 아닌 학보사를 다니며 쌓인 인터뷰 실력을 머나먼 우간다 그것도 치왕갈라 마을에서 써 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교 선생님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가 한 질문들을 보호자들에게 루간다어로 전달하였고, 보호자들은 자신과 아이의 삶에 관심을 가진 칭총에게 아낌없이 이야기를 전했다. 그동안 내가 이곳에서 어떤 쓸모가 있는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해 자신감을 잃었던 봉사활동 중 드디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에 맞게 쓰여지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질문들을 통해 알게 된 아이들의 사연 중 한 아이의 사연은 이랬다.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은 채 남편이 에이즈로 사망하자 받은 검사에서 자신과 아이 또한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생계가 막막해지자 그나마 갖고 있던 집을 팔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에 집을 만들었다. 바나나 줄기와 잎으로 엮어 진흙을 바른 모자의 집은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허물어졌다. 진흙 사이사이로 덧댄 검은 비닐봉지도 거센 비바람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기가 되면 모자는 서로 흩어져 마을의 남의 집으로 대피해 잠을 청했다. 에이즈로 약해진 몸은 남의 집 밭일을 거들기에도 벅찼다. 밭일로 받은 고구마나 카사바, 옥수수로 끼니를 해결하는 어머니는 재혼을 꿈꾸기에는 나약하고 아픈 몸을 가졌다. 아이 또한 깡마른 몸으로 집과 학교를 오고 가는 것조차 힘에 겨웠고 곧잘 아픈 탓에 결석이 잦았다. 아이에게 꿈을 묻자 머뭇거리다 교사가 되고 싶다고 나지막히 말했다. 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을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너의 사진과 이야기를 보고 너를 도와줄 수 있는 후원자들을 찾아주겠다고 말하며 그 집을 나섰다.


그 집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걷고 있을 때 아기(Agnes)가 말했다. 저 어머니가 마을에서 성매매를 하고 있어서 소문이 매우 좋지 않다고. 어떤 방식으로 저 어머니의 성매매를 비난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생계수단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하나 남은 몸마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지금이라도 무엇이든 배우러 학교에 가는 것일까 아니면 고결하게 굶어죽고야 마는 것일까. 아이들의 프로필은 내가 봉사활동을 마치고 난 2010년 2월이 넘어서야 완성되었고, 코트폰 홈페이지에 올라가 후원자들의 도움을 기다렸다. 그리고 몇 개월 후인 2010년 7월 다시 우간다로 돌아갔을 때 코트폰을 방문한 나는 그 바나나집 아이를 찾았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그 후에도 코트폰을 찾아갔지만 아이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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