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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사가 나리 Feb 06. 2023

내가 아끼는 물건은....

지극히 소박한 내 인생의 기록물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었을 때 자서전을 쓰는 많은 유명인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서전을 쓰는 것은 자신의 삶의 부분 부분을 모아서 정리하고 일목요연하게 훑어볼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오늘 하루에 무엇을 하였고, 느꼈는지 적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 아니 실제로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 이쯤에서 나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만 일단 패스하고 계산은 멈춰주시고 --에는 학교 숙제에 항상 일기 쓰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방학 숙제로,  개학 며칠 전에 몰아서 20여 일 짜리 일기 패키지를 쓴 적도 있긴 하지만, 그건 나뿐 아니라 당시 모든 초등학생들에게 적용되었던 국룰이 아니었을지.

    

   중고등학교 시절에 여중, 여고를 다녔던 나는 예쁘고 귀여운 표지의 일기장을 마련해서 나만의 비밀 이야기들을 적곤 했다.

      “아니 그 교회 오빠는 기타 치면서 왜 웃는 건데? 오늘 진짜 나한테 왜 그래? 나랑 눈 세 번은 마주침. 뭐지, 뭐지?”   머 대충 이런 식의 감상들이 적혀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 시절엔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이 문구점의 인기 판매 품목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일기 쓰기의 의무에서 해방되었던 나는 매일은 아니었지만 생각날 때마다, 무언가 적고 싶을 때마다, 누구와 어디를 갔다 왔고,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시시콜콜 기록하였다.

    

    여고를 졸업하고,  다시 여대에 입학한 나는 학교에서 매년 학기 초에 나눠주는 초록색 수첩에 나의 일상과 느낌들을 오밀조밀한 글씨로 거의 매일 적어 놓았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내 손에는 동글동글한 나리체로 적힌 일상의 이야기들과 스마일 표시, 우는 얼굴 그림 등 이 빼곡히 담긴 4권의 초록색 수첩이 남게 되었다.  그 안에는 ‘이나리’라는 한 사람의 희로애락이 짤막한 단문들로 쓰였고, 또 가끔 나만 알고 싶은 비밀은 전공인 프랑스어로 은밀하게 기록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우리 집에서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하하.  고맙게도 당시 우리 집에는 다들 독일어와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배우신 분들만이 나와 손이 닿을만한 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학교 초록수첩 4권을 손에 쥐고,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한 나는 다시 대학원 2년 동안 받은 회색 대학원 수첩 2권과 2권 분량의 내 삶의 기록을 더 갖게 되었다.  

     

    결혼할 때도 일기장과 수첩들을 이고 지고 이사를 했다. 나의 초등학교 일기장을 아직 잘 보관하고 있는 나에게, 아빠는 항상 그 일기장 내용을 다듬어서 책으로 내라고 하신다.  이제는 어른이 된 나의 초등학교 시절 일기의 내용이 나의 개인적인 기록일 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 생활 모습 등을 반영하고 있으니 또 다른 큰 의미를 지니는 것 아니냐고 하시면서.

  

    내 낡은 일기장 공책들이 과연 책으로 낼만큼 가치가 있을지, 글은 잘 다듬어서 쓰였는지, 창고 한 귀퉁이에 놓인 박스에 들어있는 오래된 일기장 공책을 다시 펼쳐 보아야겠다.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나의 애장품 목록 1호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아 온 일기장들과 수첩들이다. 나의 애장품 목록은 해가 갈수록 자연스럽게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나의 삶의 햇수가 해마다 커져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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