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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사가 나리 Jul 08. 2023

20대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이렇게 살아봐, 다시 산다면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타임슬립, 그것처럼 나의 시간도 거꾸로 돌려서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20대의 나에게 무어라 말해줄 수 있을까.  

 

   일단은   “얘!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 자신이라는 걸 기억하고 행동해!"


   난 어찌 보면 너무 주변 사람들의 말에 순종적으로 반응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부모님이 나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강한 영향력을 끼치신 분들일 것이다. 일단 성격적으로도 누구와 부딪히거나 불편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힘들게 사춘기를 보낸 작은 오빠를 보면서 사랑스러운 막내딸인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곧잘 했던 나는 영어, 국어, 독어 같은 문과 과목과 음악, 미술, 체육 같은 예체능 과목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소위 강남 8 학군의 여고에서 일 등급이라는 체급을 지니고 있던 나는 원래는 가고 싶은 과가 연극영화과였다. 공부만큼 노는 거에 빠지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 주는 게 너무너무 좋았다. 학급 부반장, 학습부장이었지만, 동시에 응원단장이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 반 대항 장기자랑에는 빠지지 않고 반대표로 나가곤 했다. 무대에 설 때 몸에 스미는 적당한 긴장감도 좋았고, 내가 의도했던 부분에서 빵 터져주는 관객들의 반응에 꽤 강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크면 연극배우도 하고 싶었고, 성우도 하고 싶었다.


   고3 끝무렵  대학입시 지원을 할 때가 되었다. 우리 학년은 대학학력고사를 치르기 전에 성적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을 지원하는 방식의 입시를 치른 유일한 아이들이었다. 학력고사 예상점수와 내신 등급만으로 대학을 선택하고 전기 대학 중에 딱 한 군데를 지원해야 했다. 우리 때는 (라테는) 말이야, 전기에서 한 곳, 전기에서 탈락한 경우에 후기에서 한 곳 만 대학을 지원할 수 있었다. 요즘은 여러 군데 넣을 수 있다고 하니, 그것은 수험생들에게 정말 다행인 일이라 생각한다.


    나의 성적은 서울대를 가기에는 모자라고, 연대의 중간 정도 성적의 학과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였다. 난 부모님께 연대를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 여중과 여고를 졸업한 나는 남녀공학에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딸들을 곱게 길러서 노처녀가 되기 전에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는 것이 부모님들의 큰 소망이었던 때였다. 이화여대를 나오신 엄마와 연세대를 졸업하신 아빠는 “여자가 서울대를 못 갈 바에는 연대보다 이대가 낫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여중, 여고를 거쳐 또다시 여대를 가야 할 운명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차선책으로 이대 영문과를 가겠다고 했다.   

  

    입학 지원 마감일 전날 밤, 나의 입시판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세 살 터울의 나의 작은 오빠였다. 연대 경제학과에 다니고 있던 오빠는 갑자기 영문과는 너무 흔하니, 고급스럽게 불문과를 넣으라고 했다. 아니, 내가 선택한 제2 외국어는 독어였고, 심지어 학력고사에서도 외국어를 선택해서 독어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다. 불어의 ㅂ 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불문과를 가라니. 자다가 봉창을 두드려도 유분수가 있지.


    문제는 엄마와 아빠 모두 작은 오빠의 말에 동조하시며,

“ 아이고, 그래, 이대 불문과가 또 이미지가 좋잖니~~” 이러신다.

   참나, 난 불어라고는 동네 빵집 파리 바게트 밖에 모른다고요.


그러나, 다음날, 나의 입학 지원서는 이대 불문과 창구에 보란 듯이 던져졌다. 다행히 입시경쟁률은 해 볼만한 결과로 나왔고, 입학시험을 이대 불문과에 가서 당당히 치르고, 합격을 하였다.


    불문과 학과 교수님들 면접날, 한 남자 교수님이 “아니, 독어로 시험을 쳤네?  여기 독문과 아니에요.” 이러셨다. 나는 “아…. 네에… 제가 꼭 배워보고 싶은 외국어가 불어여서 불문과를 오게 되었습니다.”라는 궁색한 변명 아닌 변명을 어느새 늘어놓고 있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매번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말 잘 듣는 착한 막내딸이었던 나의 인생은 나의 주체적인 선택에 따른 결정이 아니라, 부모님, 형제, 친구의 말에 따라 움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내가 또 귀가 심하게 얇은 편이라, 무슨 말을 들으면 너무 잘 믿고,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내가 불어불문학과를 안 가고, 가고 싶었던 연극영화과에 갔었다면, 난 지금쯤 유명한 배우가 되어 있을까?  하긴 연극영화과는 어느 학교 건 간에 극심한 경쟁률로, 들어가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이긴 했지만. 배우가 못 된 한을 요즘 오디오 플랫폼 연기리딩방에서 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많은 사건들에서도, 많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에서도,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이라는 생각을 깊이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내 인생의 방향을 옮겨놓는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 20대의 나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야.

         네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그 후의 책임도 네가 지면서 살아가렴.  

         이 언니가 살아보니 그게 중요한 것 같아.

         어떤 다른 이의 인생을 네가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라, 나리 너의 인생을 사는 건 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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