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익어갈 무렵, 수라는 부모로부터 마침내 독립했다. 혼자 지낼 방을 구하는 것부터 녹록지 않았다. 일단 수중의 자금이 넉넉지 않았고, 저렴한 비용으로는 절대 쾌적한 공간을 얻을 수 없었다. 깨끗하고 예쁜 신축 건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방세가 고가였다. 당연지사였다.
그녀는 여기저기 집을 보러 다니면서, 한없이 비참해졌다. 합리적인 가격이다 싶어서 직접 현장에 가보면, 실물은 사진과는 영 딴판이었다.
‘이거, 순 사기잖아? 낚였네……. 휴, 이런 곳에서 더 머물렀다간 미래가 너무 암울할 것 같아!’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앞으로 최소 몇 년간 머물 공간인데, 돈이 없다고 해서 눈을 마냥 낮출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수라는 대학로까지 흘러 들어갔다. 집주인아주머니는 처음에, 수라를 빛이 안 드는 구석진 방으로 안내했다.
“여기 말고, 볕 잘 드는 방 있을까요? 창이 하나뿐이네요. 두 개 이상은 돼야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다른 방을 하나 더 선보였다. 수라가 원하는 대로 창문이 2개였고, 맞은편에는 아파트 내부의 소나무 정원이 보였다. 단점이라면, 도로변이라서 소음과 공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긴 원래 월세는 안 받아요. 전세만 받는 방이에요.”
“아, 저는 월세 희망해요. 전세는 비싸서, 안 돼요. 저, 제가 사연이 있거든요. 들어주시겠어요?”
아주머니는 수라의 딱한 사연을 듣고, 방세를 조금 깎는 아량을 베풀었다. 마침, 공실이 많은 모양이었다. 수라는 고민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다며 귀가했다.
다음날, 아주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언제 이사 올 거예요?”
“네? 저 아직 확답 안 드렸잖아요. 좀 더 알아보려고요.”
“그러지 말고, 그냥 오세요. 관리비 안 받을게요. 다른 덴 이런 조건 없을걸요?”
수라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결단을 내렸다. 집주인이 적극적으로 수라를 붙잡았으니, 그녀는 못 이기는 척 계약서에 서명했다. 수라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본가를 오가며 짐을 옮겼다.
“안 나갔으면 좋겠는데.”
자영은 수라를 붙잡는 시늉을 했지만, 수라는 자영의 만류를 뿌리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가를 나섰다. 반면, 수찬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대학로에 위치한 코딱지 만한 자취방이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수라는 자유를 만끽했다. 한 달 남짓 지났을 무렵, 그녀는 문득 외로웠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 혼자라니 적적했다.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보며 나가 놀 궁리 중이었다.
‘단풍놀이하러 등산 가고픈데, 혼자 가긴 싫고……. 동행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한담?’
연락처 목록을 아무리 뒤져봐도, 같이 갈 만한 상대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인터넷상에서 새 친구를 사귀어 볼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GPS를 켜놓으면, 사용자들 간의 거리가 측정되는 앱이 있었다. 동네 친구를 사귀어 볼까 해서 접속했다. 그런데, 마침 Mountain이라는 대화명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 바로 이 사람이야! 오죽하면 대화명부터 산이겠어? 이 순간, 아니, 예전부터 내가 찾던 사람이 분명해! 분명,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겠지?’
온라인을 통해 사람을 만난다는 게 쉬워 보이지만, 그간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상한 사람도 많았기에, 일단 그의 게시글을 쭉 훑었다.
본인 사진은 없었고, 나이는 19살이라고 했다. 앱 사용자들 대부분이 실제 나이를 공개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설마, 미성년자는 아니겠지! 뭐, 어때? 일단 말이나 걸어볼까?’
게시물은 몇 개 없었으나, ‘친구가 필요해’라는 문장이 강하게 와닿았다.
‘동병상련이로군. 먼저 말을 걸어볼까?’
용기를 내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답은 곧 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등산 좋아해요?”
“아뇨, 등산 안 좋아해요.”
“아, 그렇구나. 아쉽네요. 등산 같이 갈 수 있을까 해서, 말 걸어봤어요. 요즘 단풍철이잖아요.”
“본명이 ‘산(山)’이요. 성은 하.”
“하산? 놀림 좀 받았을 것 같은 이름인데요.”
“하하, 그랬었죠.”
“우와! 이름 좋네요! 근데, 등산 안 좋아한다니까 등산 갈 일은 없겠네요.”
“산책은 가능해요.”
“그래요? 그럼 수목원 산책할래요?”
“좋아요. 언제 만날까요?”
그들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만나는 날짜와 시간, 장소를 상의했다. 다가오는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꾸준히 연락을 이어갔다.
“그런데, 나이 물어봐도 돼요?”
“열아홉 살이요.”
“네? 그럼 고등학생?”
“학교는 안 다녀요. 검정고시 합격했고, 식당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잠깐 쉬고 있어요.”
‘헉, 미성년자잖아! 진짜 열아홉 살이었어!’
수라는 가슴이 철렁했다.
“큰누나는 하늘, 작은누나는 하바다, 저는 하산. 이렇게 삼 남매예요. 어렸을 적부터 누나들이랑 자라서, 누나들이랑 잘 어울릴 수 있어요. 혹시, 불편하세요?”
“아니, 뭐……. 불편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 음…….”
사회적인 시선과 관념이 떠올라, 순간 복잡한 심정이었다.
‘내가 나쁜 짓 하려고 얘 만나는 건 아니잖아? 침착하자!’
때마침, 평점 9점대의 영화가 이목을 끌었다.
‘요즘 볼만한 영화가 뭐가 있을까? 어, 이건 뭔데 점수가 이리 높아?’
외국의 유명한 가수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었다. 그 외에 다른 상영작은 볼만한 작품이 딱히 없었다. 산에게 물으니, 그도 수락했다.
“그럼, 20시에 영화관에서 만나자.”
금요일 밤이었다. 수라는 퇴근 후,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었다. 화장도 특별히 신경 써서 했다.
‘어린애 만나려니, 긴장되네. 아줌마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검정 가죽 재킷을 걸치고, 검은 가죽 치마를 입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극장에 도착했다. 산은 오는 중이었다. 기다렸다. 산과 만나기 전, 서로 사진을 교환했다. 사진으로 본 산은 그냥 평범한 10대 남자애였다. 그래서, 수라는 솔직히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매표소 앞이야. 검은색 상, 하의.”
“저도 도착했어요. 갈색 롱코트.”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자, 저만치서 키 크고 하얀 남자가 수라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이지 않겠는가?
‘어? 애가 아니고 남자잖아! 게다가, 사진보다 훨씬 잘 생겼어! 이럴 수가!’
충격이었다. 산은 사진보다 실물 파였다. 갑자기 수라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훗날, 그에게 첫인상을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30대 초반으로는 안 보이던데. 누나 처음 보고, 20대 중반 정도로 생각했어!”
영화는 기대에 못 미치게끔 지루했다. 남자 주인공이 처음엔 이성애자였으나, 후반부로 가면서 동성애자로 탈바꿈했다. 두 남자의 그림자가 겹치는 화면을 보며, 수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목구멍으로 침 넘기는 소리가 혹여 산에게 들릴까 봐, 그녀는 안절부절못했다.
‘으악! 이거 분명 15세 관람가라고 했는데, 이런 내용이 나와도 되는 거야? 지금 미성년자랑 관람 중이라고!’
다음 날 또 만나기로 했으니, 영화만 보고 일찍 헤어졌다. 귀가하니, 산으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역 앞에서 아줌마들이 자고 가라고, 자꾸 말 걸어요.”
훤칠한 키의 산을 보고, 미성년자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마 드물 거라고 수라는 생각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