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아침 일찍 수라네 도착했다.
“벌써 도착했어? 밥은 먹었고?”
“빵 조금 먹었어요.”
“그걸로 배가 차겠어? 잠깐 집에 와서, 밥 먹고 가.”
수라는 직접 만든 카레를 데워 산과 나눠 먹었다.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음식이 맛이 없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산은 편식이 심했다. 당근, 양파, 감자가 잔뜩 든 카레가 그의 입맛에 맛있을 리 만무했다.
산림욕장에서 산책했다. 아홉 시, 숲 속은 서늘했다. 인기척은 없었다.
“추워?”
“네, 몸이 떨려요.”
아무 말 없이 수라가 산에게 팔짱을 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더 떨려요!”
수라는 산을 보고, 싱긋 웃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듣자 하니, 그는 그때, 설레었단다.
그들은 대학로에서 점심으로 떡볶이를 먹고, 동전 노래방에 들렀다. 비좁은 방에 둘이 앉아 네 곡씩 열창했다. 산이 노래할 때, 수라는 그의 허리를 가볍게 안았다. 산도 수라가 노래 부를 때,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수라는 산에게 보호받는 기분이 들어서 유쾌했다.
“혹시, 팅클 알아?”
“아뇨, 몰라요.”
“아, 우리 세대 차이 나지. 괜찮아!”
“이혜리는 알아요.”
마침 이혜리의 얼굴이 화면에 선명하게 클로즈업됐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혜리 예쁘다…….”
그러자, 곁에서 산이 이렇게 말했다.
“누나가 더 예뻐요.”
순간, 수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응? 내가 예쁘다고?’
기분은 좋았지만, 그녀는 태연히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내색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는 언니 집에 초대했거든. 이따 올 거야. 이제, 슬슬 장 보러 가려고.”
“같이 장 봐요.”
그는 친절했다. 감자, 당근, 양파, 춘장 등을 집어 장바구니에 넣고, 자취방까지 옮겨주었다. 산의 든든한 모습을 보며 수라는 고마웠고, 믿음직스러웠다.
수라는 무릎을 꿇어 재료 정리를 했다. 냉장실에 차곡차곡 재료를 넣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동안 산은 자연스럽게 방에 들어왔다. 수라가 그를 돌아봤다.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막 들어오네? 아, 아까 여기서 같이 카레 먹어서 그런가?'
산은 수라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집에 안 가나?’
수라는 산의 곁에 슬며시 다가가, 장난스럽게 그를 덥석 안았다. 그러자, 산이 말했다.
“누나, 사랑해요.”
그 말을 듣고, 수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달콤했지만, 한편으론 흠칫 놀랐다.
“나도, 사랑해.”
분위기상, 수라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 수라는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사귀는 거야?”
“응, 우리 사귀어요.”
“그래, 그럼 오늘부터 1일!”
이윽고,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수라는 산과 침대에 누워 뒹굴던 중이었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그렇게 시간이 덧없이 흘렀다. 그녀는 며칠 전, 은자를 초대하기 위해 연락했다.
“언니, 음식 뭐 좋아하세요? 요리해 드릴게요.”
“어머...”
“왜요?”
“아니, 좋아서. 딱히 생각나는 건 없어. 수라가 잘하고, 먹고 싶은 걸로 먹자.”
“알겠어요.”
“집에 뭐 필요한 거 있어?”
“남자요.”
“그래, 가는 길에 구해볼게.”
그렇게 대화는 웃음으로 마무리됐다. 수라가 은자를 위한 요리를 시작하려 하자, 산은 선약을 취소하길 바랐다. 수라는 곧 손님이 올 거라고 했으나, 산은 자신과만 함께 있기를 바랐다. 수라는 내심 곤란했지만, 기분은 유쾌했다.
산은 수라를 돕겠다며 서툰 솜씨로 양파를 썰고, 감자 껍질도 깎았다.
‘와! 이렇게 착하고, 다정한 남자가 내 애인이라니!’
수라는 믿기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쓸쓸한 자취방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은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벌써 도착했단다.
수라는 당황해서, 서둘러 산을 내보냈다. 산은 양말 두 짝을 미처 신지도 못하고, 겉옷만 챙겨 황급히 문밖으로 나섰다.
은자가 곧 도착했다. 수라는 은자에게 혹시, 방금 남자 한 명 마주치지 않았냐고 물었다.
“응, 학생 하나 나가던데. 얼굴은 잘 못 봤어. 왜, 혹시 남자 친구야?”
수라가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는 어떻게 항상 남자 친구가 있는 거니? 그래, 이번엔 몇 살 연하야?”
수라는 은자에게 산의 나이를 사실대로 말했다. 은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도 참, 대단하다!”
수라는 난생처음 짜장밥을 만들어 은자에게 대접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익숙한 맛이었다. 설거지와 양치를 마치고, 언니와 산책을 나섰다. 그들은 음료를 하나씩 들고, 동전 노래방에 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20대 남자들 셋이 내렸다. 가장 먼저 나온 남자가 수라를 유심히 봤다. 찰나였지만, 수라도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수라가 은자에게 말했다.
“셋 중에 가장 오른쪽에 있던 남자가 눈빛이 뜨겁던데요. 남성적이네요.”
“넌 자나 깨나 남자 생각이구나! 네 에너지 20%만 나한테 있으면 참 좋겠다. 난 주변인들 얼굴 전혀 안 봐. 신경도 안 써.”
은자가 자주 가는 노래방에 갔더니, 시설이 별로였다. 수라의 단골 노래방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이동하던 중, 아까 봤던 남자들과 다시 마주쳤다.
“아까 그 남자들, 또 보네요.”
“너처럼 이성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일에서도 성공하더라!”
사실, 은자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은자는 내향적이고, 시간관념도 부족했다. 도무지 밖에 나오지 않는 집순이였다.
그들은 원래 사제지간이었다. 수라가 18세, 고등학생 시절에 미술학원에서 선생님과 제자로 은자를 처음 만났다. 은자는 긴 생머리에 흰 피부, 갸름한 얼굴에 맑은 눈과 오뚝한 콧날, 그리고 귀여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당시, 21살의 은자는 멋진 남자 친구와 연애 중이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애인도 남편도 없다. 여전히 미혼이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수라가 작년에 언니를 만났을 때, 그녀는 8년간 연애한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였다. 몇 번의 소개팅을 했으나, 뚜렷한 성과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라가 은자를 자취방으로 초대했을 때, 그녀는 간만의 외출이라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그녀의 직업은 프리랜서 작가인데, 작업하느라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그들은 함께 있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발견하고, 신기해했다. 서로 다르기에, 평소에는 몰랐던 본인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쉬웠다. 또, 서로 부딪칠 일이 없어서 좋았다. 원래 비슷하거나 같으면, 자석이 같은 극끼리 서로 밀어내는 것처럼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언니,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야, 벌써 그런 말 하면 내가 너무 노인이 된 느낌이야.”
“이제 건강 챙길 나이죠. 다음에 또 만나요!”
그날 밤, 자정이 넘어서 산으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왔다.
오늘 어색할까 봐 먼저 손잡아주고,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기대 안 했는데 하루 만에 진도 다 뺐네. 먼저 자서 서운했을 수도 있겠지... 미안해ㅠㅠ 갑자기 잠들었어ㅠㅠ 기다리려고 했는데 눈이 감겼네. 그래도 누나랑 같이 있는 좋은 꿈 꿨어.
오늘 반나절 동안 밥도 같이 먹고, 꼭 껴안고 누워있기도 했네. 고마워. 내가 좀 더 잘해서, 누나랑 거리낌 없이 지내도록 할 거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똑같이 사랑한다고 대답해 줘서 좋았어. 먼저 안아줘서, 너무 설렜어. 앞으로 누나랑만 함께 할 거야. 약속!
푹 자고, 내일 일어나서 연락해요. 수라 누나, 사랑해♡
수라는 다음 날 아침에 확인하고, 빙그레 웃었다.
'내게 이런 행복한 순간이 오다니! 꿈만 같아(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