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젤리J Oct 16. 2023

호수 보러 가다가 조난당할 뻔했다

표지판을 따라갔을 뿐인데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마터호른의 정상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마터호른이 그려진 토블론 초콜릿과 카메라를 챙겨서 나왔다.


체르마트는 1961년 법으로 내연 기관 차량 운행을 금지해서 전기차만 다닐 수 있는 청정 구역이다. 그래서인지 공기도 맑고 전체적으로 고요한 느낌을 풍겼다. '스위스'하면 떠올리는 목가적인 모습이 딱 체르마트의 모습이었다.



이날의 일정은 푸니쿨라를 타고 블라우헤르트까지 올라 슈틸리제(Stellisee) 호수와 라이제(Leisee) 호수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슈틸리제 호수 쪽으로 걸었다. 호수를 구경하러 온 관람객이 많았기에 따라가면 됐다.


슈틸리제 호수에 도착하니 구름이 마터호른의 정상을 가리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면 사라질까 싶었지만 꼭대기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구름에 사진을 찍고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기로 했다.



토블론 인증샷도 찍었다. 다른 분들 인증샷에는 작은 걸 사서 꼭대기에 딱 맞춰 멋있게 찍으셨던데 나는 그냥 큰 토블론 초콜릿을 먹을 생각에 들떠서 엄청난 크기의 토블론을 샀다. 그래서 뒤에 마터호른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초콜릿 사진이 남았지만, 초콜릿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뒤에 마터호른 있어요


슈텔리제 호수 근처에도 그린지제(Grindjisee) 호수가 있다고 했지만 가는 길이 험하다는 소리에 라이제 호수로 가기로 했다. 스위스에 와서 하이킹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한 초보였다.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관광객들은 그린지제 호수를 보러 가기로 했는지 반대편으로 향했다. 나는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에서 라이제 호수를 찾아 걸었다.


표지판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사이 정도 걸리겠지,라는 생각으로 걷는데 길이 점점 좁아졌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그런 건지 궁금해하며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앞에 쌓인 돌무더기를 보고 멈춰 섰다. 여기가 길이 맞긴 한 건가?


길인 듯 아닌 듯

마치 길로 돌들이 쏟아져내린 모양새였다. 작은 돌들이 아닌, 큰 바위도 있었던 데다가 저 앞의 길은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사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양옆의 경사가 꽤 가팔랐기 때문에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선택해야 했다. 뒤를 돌아보니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 자신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또 길 잃은 거 아냐?'


그렇다. 나는 길치였다. 분명 표지판을 보고 따라왔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여태까지의 행적 때문에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앞 뒤로 아무도 없는 걸 보자 겁도 났다.


차라리 누군가라도 있었다면 '내가 험한 하이킹 길에 들어왔구나.'라고 생각할 텐데 아무도 없으니 '외국 나와서 산에서 길 잃은 거야?'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한 명도 안 보이고 그 와중에 산 염소 같은 애들은 보이고. 분명 화살표를 따라왔는데 길이 왜 사라진 건지. 돌아가기에는 멀리 와버린 것 같고...


일단 휴대전화 신호가 잡혀서 조금만 더 가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돌길을 건넜다. 길인 듯 아닌 듯하는 좁은 길이 끊길 듯 이어졌다. 비탈길을 내려가며 다시는 하이킹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무렵 여행객 두 명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 최악의 일이 생기진 않겠구나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다시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고된 길을 벗어나야 했다.


결국 내가 목표로 했던 라이제 호수의 모습이 저 멀리 보이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내가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그 여행객 분들도 길을 잃은 건 아니겠죠...?) 그냥 겁먹은 하이킹 초보였을 뿐.


그렇게 힘들게 도달했던 라이제 호수는 별 감흥이 없었다. 가는 길이 워낙 험난해 기력을 다 쏟아부은 탓이다.


어찌 되었든 머나먼 땅에서 조난당해 구조대를 부르는 일이 생기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블라우헤르트로 돌아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편하게 라이제 호수로 갔으면 될 것 같은데 하이킹을 몇 번 했다고 자신감이 생겼던 모양이다. 편한 길이라면 2시간 하이킹이 그렇게 긴 건 아니었기에 방심했다.


표지판을 잘 따라갔던 나로서는 억울한 일이기는 하지만 혼자 여행인 만큼 다음부터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자고 다짐하며 산을 내려갔다.


체르마트 시내에서 기념품을 사고는 저녁도 대충 때우고 잠에 들었다. 스위스 여행 중 제일 긴 하루였다.





<여행 당시 남긴 기록>


기념품 가게에 들렀는데 소 목각인형 50% 세일을 하고 있어서 조그마한 소를 6.4프랑에 샀다. 더 많이 샀어야 했나 후회도 되지만 하나면 충분한 것 같다. 그나저나 여긴 체르마트 기념품밖에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마다 조금씩 살 걸 그랬나?


슈텔리제에서 라이제 가는 길 너무 힘들었다...


이전 09화 내 앞좌석 할머니가 자리를 옮기셨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