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터트리면 안 됐어.
"자기야 나 김밥 먹고 싶어. 저번에 자기가 싸 준 김밥 되게 맛있었는데."
저번 속초여행 때 쌌던 제육김밥이 꽤나 성공적이었나 보다.
"아 그래? 그럼 내가 싸줄게!ㅎㅎ"
이번 주말 에버랜드에 갈 생각에 한껏 들뜬 나는 남자친구에게 선뜻 김밥을 싸준다 하였다. 엄마아빠께 싸드린 적도 없는 김밥을 또 싸준다고 하다니... 내가 오빠를 많이 좋아하긴 하나 보다.
금요일 저녁,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봤다. 몸은 지치고 눈은 풀렸는데 놀러 갈 생각에 마음만은 설레며 장을 본 것 같다. 집에 도착하여 혼자 무겁게 낑낑대며 들고 온 장바구니를 풀었다. 내일 아침에 김밥을 바로 쌀 수 있도록 재료를 씻고 자르고 물기를 말려 통에 가지런히 넣어 두었다. 김밥은 참 번거롭고 준비할 것도 많은 음식이지만, 그래도 놀러 갈 때 김밥만큼 설레는 음식은 없는 것 같다. 오빠와 맛있는 김밥을 먹으며 놀러 다닐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벌써 좋았다.
저녁 9시쯤 퇴근이 늦어진 남자친구가 우리 집으로 왔다. 그는 하루가 꽤나 고됐는지 많이 피곤해했다. 오빠를 소파에 앉히고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꽤나 힘들었겠다 싶었다. 우리는 잘 준비를 마치고 넷플릭스를 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아침 7시 눈이 번쩍 뜨였다.
‘김밥...!’
피곤해하던 남자친구를 깨우고 싶지 않아 최대한 소리를 줄여가며 김밥 재료를 준비했다. 햇반을 돌려 양념을 하고, 소시지를 굽고, 야채를 볶아 책상에 알록달록 김밥 재료를 늘어놓았다. 시간을 보니 벌써 8시가 가까워졌다. 8시 30분에는 나가야 하는데...! 우리는 에버랜드 표를 정해진 시간에 받기로 했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빠, 이제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일어나자!!"
나는 김밥을 본격적으로 싸기 시작하며 남자친구를 깨웠다. 김밥도 싸고, 씻고, 옷도 입고, 화장도 하고, 부엌도 치워야 할 텐데...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 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느긋하게 일어나 김밥을 싸는 내 손을 응시했다.
며칠 전부터 무슨 김밥을 쌀까 고민고민하고, 어제 퇴근 후에는 무겁게 장도 보고, 집에 와서는 재료 손질도 해놓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김밥까지 싸고 있는터라... 솔직히 오빠가 어떤 말을 해줄지 내심 기대했다.
"자기야 깻잎을 도대체 몇 장을 넣는 거야, 너무 많은 거 아니야?"
.
.
.
'응...? 나 지금 뭘 들은 거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깻잎 네 장을 둘씩 나눠 쌓고 가운데 한 장을 더 추가하고 있던 내 손이 멈칫했다. 오빠가 맛있다고 한 저번에 싸준 제육김밥에도 깻잎이 다섯 장 들어간 건데!! 저번에는 분명 깻잎 들어간 김밥이 맛있다고 말해놓고!!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지만 오빠의 그 말 한마디가 나의 설렘을 벌써 갉아먹고 있었기에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래? 근데 많이 넣어도 막상 먹으면 잘 안 느껴져~"
나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 샤워를 하러 갔다. 그가 나올 때 즘 나는 김밥을 거의 다 싸갔다. 마지막 김밥을 싸기 위해 김을 깔고 밥을 올리고 있을 때, 머리를 말린 그가 와서 말했다.
"근데 밥 양 좀 줄이면 안 돼? 나는 밥 적은 게 좋아 “
후... 당장이라도 밥풀이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저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내가 네 엄마니...?'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저 똑똑한 머리에는 상대의 기분을 감지하는 센서는 없는 건지 아님 아직 잠이 덜 깨서 작동이 안 되는 건지! 화가 났다.
"아 나 에버랜드 안 갈래."
평소 같으면 내가 네 엄마냐! 하며 욕하고 웃으며 넘어갔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이 날 따라 나는 이 상황을 장난으로 승화시키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렇게 우리의 싸움은 또 시작됐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오빠에게 바라는 말이 있었다. '김밥재료를 사고 준비하느라 고생했겠다./힘들었겠네./아침 일찍부터 혼자 김밥 싸느라 고생했네./너무 고마워./맛있어 보인다.' 등등의 말... 그냥 이런 말 한 마디면 나는 충분했다.
"이렇게 한 마디만 해주면 안 돼? 이게 어려워?"
하지만 그는 내가 서운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분명 고맙다고 말했다는 거였다. 정말 그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의 그 고마운 마음을 전달받은 기억이 없었다. 지나가는 말로 고마워~했던 건지, 나한테 안 들리게 고맙다고 했던 건지... 내게는 기억조차 없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이따가 운전도 할 건데, 김밥 싸는 수고로움은 네가 감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는 태도를 비췄다.
화가 났다. 굽히지 않는 저 태도에 나는 울음이 터졌다. 오빠는 그제야 나를 보듬고 미안하다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울기 전에는 마치 자기가 정답이고 나는 오답이듯이 대하더니, 우니깐 내 말이 다 맞다고 하는 모습이 더욱 얄미웠다.
"이럴 시간에 치우는 거나 도와줘! 나 빨리 준비해야 해"
시간이 촉박했기에 오빠가 나를 달래는 시간도 나는 아까웠다. 나는 나를 안고 있던 오빠의 손을 치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왔을 때, 그는 상을 다 치우고 김밥을 썰고 있었다.
'딱, 탁, 탁...'
"엇... 터졌네"
무딘 칼날에 이쪽저쪽에도 붙지 못한 김이 가로로 쫘악 찢어지며 색색의 재료들이 터져 나왔다. 옆구리 터진 김밥이라... 어쩐지 내 마음과 닮았다 생각했다.
김이라는 겉포장지로 내 안의 미움, 짜증, 이기적인 마음들을 예쁘게 잘 감싸놓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 김이 쫘악 찢어지니 나의 솔직한 속내들이 그 틈으로 와장창 쏟아져 나온 느낌이었다. 그러게... 오빠는 왜 내 김을 찢어서 이 엉망진창인 속내를 꼭 봐야만 했던 거야...!
아무 말 없이 김밥을 썰어 통에 넣고 있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행동이 고마웠지만 이미 찢어진 마음과 이미 쏟아져 나온 엉망진창인 나의 속내는 쉽사리 원래 모습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의 이 엉망진창인 속내를 그에게 그대로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터져 나온 엉망진창인 속내를 다시금 입으로 삼켰다. 더 이상 화를 내기도, 얼굴을 붉히기도 싫었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인걸! 그래 조금 더 노력해 보자. 나는 그를 사랑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