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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Nov 21. 2023

가식덩어리 속 응어리

나만 그런 줄 알았지

그를 대하는 내 행동과 말투가 가식적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가식으로 대한다는 것은 참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이었다. 누군가를 가식으로 대하면서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에게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것이리라.


나는 그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했다. 그를 아껴주고 챙겨주고 싶은 나의 행동은 절대 가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고마운 마음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내 마음속 작은 소용돌이들을 무시한 채 아무렇지 않은 척 행복한 척을 하는 것이 나의 가식이었다.


나는 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가식덩어리었던 셈이다.


내 마음속 작은 소용돌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기가 커지고 분명해졌다. 그 마음을 더 이상 무시하기도 외면하기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다.


내가 내 마음을 돌보지 않고, 그와 만나 가식을 떠는 날이면 그 소용돌이들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그와 함께 웃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나는 내 안에 있는 기분 나쁜 응어리를 느꼈다. 처음엔 가끔 느껴지던 응어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를 점점 무겁게 또 더 무겁게 가라앉혔다.  


나는 그 응어리의 실체와 그것을 없애는 방법도 알고 있었지만, 그 응어리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그 응어리를 마주한다면 어쩐지... 내가 큰 결심을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응어리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저 무겁게 안은채 살아갔다.


그것들을 안고 사려니 삶이 왠지 모르게 우울해지고 가슴 한 편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이상하게 묵직한 기분에 잠식되어 한숨을 푹푹 내쉬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났을까. 내가 너무 힘겨운 나머지 그와 만나는 일조차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어느 때처럼 내 안의 응어리를 꾹 누른 채 가식적인 미소와 말투로 그와 시간을 보냈는데, 어쩐 일인지 그날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웠다.


우리는 나의 집에서 야식을 먹기로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집으로 향하는 그 차 속의 공기는 마치 뜨거운 스팀열기로 가득한 찜질방처럼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었다.


그는 나를 나의 집 주차장에 내려주며 집에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사려 깊은 말투로 자신은 차로 한 바퀴만 더 돌고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왜?’라고 묻고 싶었다.

‘뭐 하려고?’라고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마음에 “그래 천천히 와”라는 말만 할 수 있었다.  


나는 집에 와 배달 온 치킨을 풀었다. 사실 나는 그가 돌아오지 않았음 했다. 그를 더 보았다간 나 안의 꽉꽉 들어찬 응어리가 터져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톡을 남겼다.

“오빠 힘들면 안 올라와도 돼. 오늘은 각자 좀 쉬고 다음에 같이 치킨 먹자.”


톡은 보냈지만 혹여나 그가 올까 싶어 나는 기분 좋은 노래를 틀고 찬물로 샤워를 하며 부지런히 어지러운 마음과 기분을 재정비했다.


삼십여분 뒤, 그는 톡을 확인하지 못했는지 조금은 밝아진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다.


집에 온 그에게 나는 어디 가서 무얼 했는지 묻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며 치킨을 먹었다.


며칠 뒤,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던 길에서 그가 말을 꺼냈다.


“나 저번에 차 타고 이쪽으로 한 바퀴 돌았어.”


“뭐 했어?”


“그냥... 차에서 소리 질렀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하얘졌다.


"많이... 답답했구나... 왜 혼자 갔어? 나도 되게 답답했는데... 나도 같이 가서 소리 지를걸"


나는 왜 혼자 갔냐고 나도 소리치고 싶었는데 데려가지 그랬냐고 진심을 담은 헛소리를 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가식은 나만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미소도 그의 상냥한 말투도 어쩌면 10 중의 3 정도는 가식이지 않았을까.


그제야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묵직한 응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의 것보다 더 무겁고 클
저 응어리는 얼마나 오래 존재했던 걸까.


그도 나와 같이 많이 답답했겠구나. 미치도록 갑갑했겠구나. 그럼에도 티를 낼 수 없었겠구나. 그도 나처럼 철저한 가식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구나.


우리의 사랑이 대체 무엇이기에 서로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할까?


내가 원하는, 너가 원하는 사랑이...이게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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