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최고 와인 Sula와 나식을 기억하며
구자라트에 있지만 고객사의 본사나 공장이 다른 지역에 있는 경우가 많아 국내 출장은 꽤 많은 편이었다. 대부분 고객사의 본사는 수도인 델리에 위치해 있어 주로 그곳으로 출장을 다녔지만, 인근 대도시인 뭄바이나 하이데라바드, 첸나이 등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 출장 중 고객사 클레임이나 제품 불만에 대한 개선점을 찾기 위한 테스트를 위한 것들은 심적으로 가장 힘든 것들이다. 공장으로 방문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열악한 산업단지에 위치한 곳을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하루 종일 고객사 라인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고민하고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작은 도시인 나식(Nashik)은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아메다바드에서 새벽같이 조그마한 경비행기를 타야 했고, 간이역 같은 공항에 내리면 택시를 타고 덜컹대는 시골길을 지나야만 공장이 나왔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는 일을 하기도 전에 진이 빠지곤 했다.
나식(Nashik)은 인도의 마하라슈트라 주에 위치한 작은 산업 도시이다. 인도의 유명한 자동차사인 마힌드라가 있으며, 자동차 관련 부품 업체도 많이 위치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이 인도 와인 산업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이 지역은 와인 생산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어, 제2의 소노마밸리(미국의 와인 재배지)로 불린다. 여름에는 평균 기온이 25°C에서 30°C 사이로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평균 기온이 10°C에서 15°C로 시원하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져 포도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또한, 이 지역의 토양은 포도의 성장을 촉진하는 미네랄이 풍부하여,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자연조건 덕분에 나식은 자연스럽게 인도 와인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 제품에 대해 불만을 가진 고객사를 찾기 위해 처음 나식에 방문했을 때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빨리 잘 끝내고 싶어 도착하자마자 테스트를 해보자고 고객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라인에 서서 땀을 뻘뻘 흘리며 진행하다 보니 벌써 저녁이 되었다. 아직 확실히 결론이 나지 않아 답답한 데다가 아메다바드로 복귀하는 비행기는 다음 날이라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미스터 차, 인도 Sula 와인 들어본 적 없어? 여기 나식은 와인의 도시야!"
차를 타고 돌아가려던 찰나, 그나마 고객사에서 우리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며 도와주던 미툰이라는 친구는 나식이 인도 최고의 와인 산지 이니깐 꼭 경험해 보라고 와이너리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금주의 도시인 구자라트에서 온 나로서는 두 귀가 쫑긋해지는 순간이었다.
미툰이 얘기해 준 Sula 와이너리에 도착하니 시골 마을 같았던 나식은 온데간데 없고 프랑스에 온 듯한 세련된 호텔과 식당 등이 함께 위치해 있었다. 와인 시음과 와이너리 투어도 가능했다. 와이너리는 아름다운 조경이 함께하는 리조트도 운영되고 있었고, 평일인데도 많은 관광객이 있었다. 매년 수십 만 명이 찾는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시원한 밤공기에 종일 있었던 피곤이 가시는 것 같았다. 와인 가격도 저렴해서 가장 유명한 Sula's Rasa Syrah 750ml는 우리나라 돈 3만 원에 불과했다. 그런데 주문한 와인병을 보니 낯설지 않은 표지에 갑자기 무언가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저번에 고아(인도 휴양 도시)에 갔을 때 아내가 정말 좋아했던 와인 같은데? 그게 인도 Sula 와인이었어?"
와인 업체 Sula는 특이하게도 스탠포드를 졸업하고 오라클에 다녔던 라지브 사만트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현재 인도에서 가장 큰 와이너리 중 하나로, 연간 100만 병 이상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대표 기업이다. 주식 상장도 되어 있다. 설립자 라지브 사만트는 "우리가 1997년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땐 인도에 와인이 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면서 "인도의 술 상점들은 사실 다 와인샵이라고 불리고 있어서, 사람들은 와인이 주류라는 뜻인 줄 알았죠."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사업 초기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라며 “교육을 많이 받은 이들, 부를 축적한 이들이 늘수록 와인 소비는 더욱 늘 것이 자명하다”라고 덧붙였다.
나식에서의 출장 중 Sula 와이너리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고객사와의 긴장된 회의를 마친 후, 와이너리를 거닐며 느꼈던 평온함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와인을 시음했던 순간은 잊을 수 없다. 특히, 인도의 와인 문화를 이해하게 된 것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와인의 향과 맛을 음미하며 나식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인도 와인 산업의 발전과 가능성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여러 번의 나식 출장 중 Sula 와이너리에서 만난 현지인들과 나눈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인도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와인의 다양한 맛과 향을 소개해주며 인도의 와인 산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인도 와인에 대한 나의 이해와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
나식에서의 와인 경험은 단순한 출장의 피로를 푸는 것을 넘어, 나에게 새로운 문화와 맛을 발견하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고객사와의 미팅은 언제나 힘들고 쌉싸름하지만, 달콤했던 와인 덕분에 언제나 나식 출장은 달콤 쌉쌀로 기억된다.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그리워할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