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선생님, 잠깐 보건실로 좀 와보세요."
기초학력 사업으로 정신없이 바쁜데 보건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교무실에 있는 나를 불러내셨다. 오늘은 또 누가 아파서 보건실에 누워있는 걸까. 툭 하면 아프다는 핑계로 보건실에 방문하는 우리 반 보건실 단골손님 3인방이 또 찾아온 걸까, 아니면 짓궂은 남학생들이 장난을 치다 어디가 또 다친 건 아닐까. 난 자리에서 일어나 보건실로 향하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선생님?"
"그게……. J가 크게 다쳤어요."
"네?!“
보건실로 들어서자 J가 보인다. 하얀 피부에 선명하게 남은 핏자국을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10년의 교직 생활 동안 학생이 이렇게 다친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보건 선생님이 응급 치료를 할 동안 나는 심호흡을 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J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무실로 돌아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 위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액정에는 얼마 전 방문한 유방외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참! 오늘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지.'
아침부터 너무 정신이 없어 오늘이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란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맘모톰을 하자고 하겠지? 시간이 없는데 언제 하지. 방학 때 하자고 하면 될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드라마에 나올 법한 말이 들렸다.
"강진경님? 오늘 보호자와 같이 내원하실 수 있나요?"
"아, 제가 지금 직장에 있어서요. 전화로 말씀해주세요."
"안됩니다. 보호자와 같이 오셔서 들으셔야 해요."
간호사는 확고했다.
"그냥, 말씀해주세요. 저 괜찮아요."
"전화로 말씀드리기 곤란하고요. 언제 오실 수 있나요? 보호자와 꼭 같이 오셔야 합니다."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왜 굳이 보호자와 같이 가야 하지?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묻고 말았다.
"혹시 암인 건가요?"
3초의 침묵. 무거운 공기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네……. 보호자와 같이 오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건지 모르겠다. 교무실 한가운데에서 마치 "감기인가요?"라고 말하듯 내가 암에 걸렸는지 확인하는 용기라니. 전화를 끊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한 동료 선생님에게 갔다.
"선생님, 저 암인 것 같아요."
그렇게 교무실 중앙 테이블에 앉아 나의 암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부장님과 교감선생님께 암인 것 같아서 조퇴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나도 놀랄 만큼 침착하고 담담했다. 내가 이렇게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었나. 교장선생님께 가서 현 상황을 말씀드리고 서둘러 조퇴를 허락받았다.
"선생님, 괜찮아요? 어쩜 이렇게 담담해요?"
누군가 이렇게 물었고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학교에서 무너져 내릴 수는 없으니까요.'
평소 그렇게 눈물이 많던 내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담대하게 암 진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참아왔던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학부모님께 전화로 오늘 상황을 알려야 했다. 남편과 만나 병원을 가는 길에도 계속 이어지는 학부모와의 상담. 통화가 계속 이어지고 결국 병원 앞에서 차마 전화를 끊지 못해 예약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한참 만에 전화를 끊자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던 남편이 말했다.
"교사는 정말 힘든 거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학부모와 상담이라니."
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할 수 없지. 그래도 나는 담임교사로서 내 역할을 끝까지 해야만 했다. 당장 내가 암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그걸 자각하고 슬퍼할 시간조차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J의 어머니는 흐느껴 우셨고,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저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도 울고 싶어요. 제가 암에 걸렸대요.'
전화를 끊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4살 딸아이 얼굴이었다. 그 애가 어른이 되는 것까지 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학창 시절을 엄마 없이 자라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뒤 이어 생각나는 남편의 얼굴. 아내 없이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꼭 나아야지.'
눈물을 삼키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난 울지 않을 거야.'
두 주먹을 불끈지며. 의사에게 암 진단을 받고 나오는 길에 나는 오늘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나를 너무 혹사시키며 살았구나. 바삐 살아온 내 삶의 시계를, 잠깐 멈추라는 하늘의 뜻이구나.'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달라져야 한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암을 이길 수 있다.
오늘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