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진경 Sep 07. 2022

엄마, 아직 기회가 남아있어!

할머니, 아니 증조할머니가 될 때까지

 어느 날 밥을 먹다가 소은이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굉장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내 머리칼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말했다.


S: 엄마, 여기 하얀 머리가 있어.

M: 어디? 엄마 흰머리 있어?

S: 응, 여기 여기!


 나의 흰머리야 예전부터 있었지만, 소은에게는 엄마의 흰머리가 처음 눈에 들어왔나 보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앗, 이제 엄마 할머니 됐나 봐."하고 엄살을 부렸다. 그러자 소은이가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S: 아니야, 엄마. 아직 기회가 남아있어! 아직 하나잖아!


 나는 기회가 남아있다는 말이 우스워서 "무슨 기회?"하고 되물었다.


S: 할머니가 되기까지 아직 기회가 남아있어. 엄마가 머리가 다 하얘지면 내가 그때 할머니라고 부를게.


 아프고 나서 나의 꿈이 할머니가 되는 거라는 걸 알 리 없는 소은이는 내가 할머니가 되면 슬플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할머니가 되기까지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며 나를 위로하는 딸아이. 아이에게 어떻게 내 마음을 전달해야 할까. 이내 나는 할머니가 되어도 괜찮다고, 엄마는 할머니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걸 포기했다. 다섯 살 먹은 아이에게 그걸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보다도 엄마가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소은이에게 엄마는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M: 그땐 소은이가 커서 소은이 아기가 엄마를 할머니라고 불러야지. 소은이가 크면 언니가 되고,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아가씨가 되고, 결혼해서 엄마가 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으면 소은이도 이제 할머니가 되는 거야.


 그런데 순간 소은이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울상이 되기 시작했다. 소은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날 것 같은 얼굴로 "나 할머니 아니야! 나 할머니 안 될 거야."라며 울먹였다. 마치 그렇게 말하면 정말 할머니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M: 그래, 소은아. 지금 당장 되는 건 아니야. 소은이는 아주 먼 훗날 할머니가 되는 거야.


 나는 소은이를 달래며, 소은이가 할머니가 되는 날을 생각했다. 어쩌면 그때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소은이가 아이를 낳아 내가 할머니가 되는 순간은 늘 꿈꾸는 장면이지만, 소은이가 할머니가 되는 것까지 그려본 적은 없었다. 아직 앞 날이 창창한 다섯 살 아이가 할머니가 되는 날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나는 소은이의 미래를 그리며 거기에 내가 있기를 바랐다.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할머니가 아직 건강하게 살아계신 것처럼.


 아쉽게도 소은이는 아직 증조할머니를 직접 뵌 적이 없다. 코로나로 인해 친할머니를 못 뵌 지도 3년이 되었다. 이번 추석에는 드디어 친할머니를 만난다. 마음 같아서는 증조할머니도 찾아뵙고 싶지만 너무 멀리 계셔서 여태껏 찾아뵙지를 못했다. 올해 안에는 꼭 할머니 댁에 가서 소은이를 보여드리고 싶다. 소은이에게 더 많은 가족, 더 많은 친척들을 만나게 해 주고 우리는 가족 공동체 안에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도 할머니가 있고, 할아버지에게도 할아버지를 낳아주신 엄마가 있다는 사실! 아마 소은이는 깜짝 놀라서 몇 번이고 물어볼 테지. '왕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엄마야?'라고.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겐 부모님을 낳아주신 조부모님이 있고, 그 위에, 또 그 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걸 아이가 알았으면 한다. 나의 뿌리를 알고, 나를 둘러싼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오늘날 내가 존재하는 것도 결국 나를 낳아준 부모와 조상이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깨달았으면 한다. 그리고 나도 백 살까지 살면서 소은이가 자식을 낳고, 그 아이가 자식을 또 낳을 때까지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할머니도 모자라, 증조할머니가 되기를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인가 싶다가도 기왕 오래 살 거 백 살까지 살며 증손주까지 봐야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나에게는 아직 기회가 많이 남아있으니까!


Photo by Rod Long on Unsplash


 




이전 26화 엄마, 사람들 앞에서 나 모른 척 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