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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 엄마처럼 예쁜 노래야.

여덟 살 아이의 장래희망과 엄마의 꿈

by 강진경

노트북 앞에 앉아 집에서 밀린 일을 하고 있는데 소은이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엄마, 잠깐 이리와 보세요. 같이 갈 데가 있어."

"소은아, 미안한데 엄마가 지금 일을 해야해서."

"엄마, 잠깐이면 돼. 내 소원이야. 응? 제발!"


아이는 눈이 초승달로 바뀌며 애교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 끌며 데려간 곳은 우리집 거실에 놓인 전자 피아노 앞. 소은이는 나를 피아노 앞에 있는 의자에 앉히더니, 내 귀에 헤드폰을 걸어주었다.


"엄마, 내가 피아노 쳐 줄게. 들어봐."


그리고 나란히 앉아 자기도 헤드폰을 쓰고 이내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엄마, 이거 봄 노래라서 엄마랑 잘 어울린다. 여기 봐. 엄마라고 써있지?"


아이가 가리킨 손가락을 보니, 정말 '엄마'라는 가사가 눈에 보였다. 제목은 '들로 산으로'라는 곡이었다.


꽃놀이 달놀이 봄놀이
봄놀이 들놀이 산놀이
엄마 아빠 손목을 잡고
들이나 산으로 놀러가자.
- 굴리굴리 솜사탕 바이엘 4권 12번, '들로 산으로'

"엄마, 이 노래, 엄마처럼 예쁜 노래야. 들어봐?"

다음으로 아이가 들려준 곡은 '꿈에서 만나요'라는 예쁜 제목의 곡이었다. 전체 곡이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16마디의 짧은 곡이었지만 엄마처럼 예쁜 노래라는 아이의 말에 그 여운은 어느 때보다 오래 남았다. 악보 위에 별과 달이 앙증맞게 그려져 있었다.

우리 함께 손잡고 꿈에서 함께 노래해요
- 굴리굴리 솜사탕 바이엘 4권 22번, '꿈에서 만나요'

"엄마 이번엔 이거 들어봐. 엄마랑 나랑 천천히 걷고 있었어. 그런데 저기서 붕어빵이 보였어. 너무 배고파.

그래서 엄마랑 나랑 이렇게 뛰는 거야."


아이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곡에 대한 설명을 신나게 덧붙였다. 악보를 보니 16분 음표 에튀드라고 적혀있었다. (*에튀트: 어떤 악기의 테크닉이나 표현방식을 갈고 닦을 목적으로 작곡된 연습곡) 처음에는 4분 음표로 치다가 그 다음은 8분 음표, 마지막은 16분 음표로 되어 있는 곡이었다.


아이의 말에 따르면 4분 음표 마디는 엄마와 소은이가 손잡고 천천히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8분 음표 마디는 모녀가 붕어빵을 발견한 순간이며, 16분 음표 마디는 붕어빵을 사기 위해 모녀가 전력질주하는 장면이 되는 셈이다.

나는 속으로 좀 놀랐다. 가사도 없고, 오직 음표만 있을 뿐인데, 이제 아이는 단순히 악보를 연주하는 것을 넘어서, 피아노를 치며 머릿속으로 다양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이 소리는 어떤 기분일까? 어떤 장면일까?' 이런 걸 생각해보라고 누가 따로 가르쳐준 적도 없건만 아이는 소리를 통해 이미지를 상상하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피아노를 치며 이런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니. 앞으로도 아이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그저 음악을 느끼고 살게 해주고 싶어 시작한 악기인데, 어느새 피아노는 아이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고, 힘든 순간마다 아이에게 힘을 주는 다정한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이제 아이는 피아노를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까지 키워가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소은이는 체르니 레슨을 시작했다. 여섯 살 봄, 아카데미아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고 일곱 살에 바이엘을 거쳐, 여덟 살 여름, 체르니 진급이니 2년 반 정도 걸렸을까.


내게 진도와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소은이가 피아노를 치며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지. 아이는 일곱 살 때 클레멘티 소니티네를 연주하며 행복해했고, 여덟 살인 지금은 바나나차차를 연주하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오늘처럼 소은이의 피아노를 연주를 듣고 있을 땐 나도 함께 행복을 느낀다. 엄마처럼 예쁜 노래라며 속삭이며 피아노를 쳐주는데 어떤 엄마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 전 소은이 초등학교 상담 주간에 상담 선생님께 들은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 소은이 꿈이 뭔 지 아세요?"

"피아노 선생님이죠?"

"맞아요. 그런데 소은이가 왜 피아노 선생님이 되고 싶은지 아세요?"

"글쎄요,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니까?"


"엄마가 소은이 피아노 연주 듣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래요."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내게 미소를 지으셨고, 나는 생각치도 못한 뜻밖의 이유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소은이가 나를 위해 연주를 하고 있었구나.'


어쩌면 이 작은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릿햇다.


소은이가 커서 무엇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소은이가 피아노 선생님이 되든, 되지 않든 나는 아이가 평생 피아노를 연주하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피아노가 늘 곁에서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으면 한다. 인생의 기쁨도 슬픔도 그 반짝이는 건반 위에서 흘러가고, 그 순간마다 소은이는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더 깊고 단단한 어른이 되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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