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아이의 인생관
"소은아, 엄마도 힘들어."
퇴근을 하고 소은이를 데리러 가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아이 앞에서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왔다. 1분 1초를 다투어 움직여야 하는 워킹맘. 아이를 제시간에 데리러 가기 위해서는 정시에 퇴근을 해야 하고, 정시에 퇴근을 하기 위해서는 그날 해야 할 일을 제시간에 모두 끝내야 한다. 교사는 하루 근무 시간 중 절반은 수업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머지 공강 시간을 쪼개어 밀린 공문을 처리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부리나케 뛰어와 아이를 만났는데 막상 아이와 만났을 때 아이가 반겨주지 않으면 엄마인 나도 슬며시 마음이 상한다.
이날은 나도 많이 힘들었던 걸까. '엄마, 힘들었지?'하고 엄마를 반겨주지 않는 아이가 야속했다. 그래서 소은이에게 엄마도 힘들다고, 엄마의 힘듦을 알아달라고 엄마도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랬더니 소은이의 대답이 가관이다.
"어쩔 수 없지.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
소은이의 애늙은이 같은 대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덟 살 아이의 입에서 인생이란 단어가 튀어나온 것도 의외였지만, 아이가 벌써 인생의 쓴 맛을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소은아, 인생은 원래 힘든 거야?"
"응, 엄마. 나도 매일 힘들어. 매일 학교도 가야 하고, 학원도 가야 하고, 숙제도 해야 되고."
"소은아, 누가 보면 우리 소은이 엄청 숙제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하는 줄 알겠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넘겼지만 속으로는 아이가 짠했다. 내가 일하는 엄마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학원을 많이 다니지도 않았을 테고, 방과 후에 조금은 더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학원을 뱅뱅이 돌다가 오면 아무리 그 학원들이 예체능학원이라고 해도 아이에게는 힘들 수 있겠지.
작년 겨울, 소은이는 일곱 살이었고, 유치원이 끝나면 미술 학원, 미술학원이 끝나면 피아노 학원. 피아노 학원이 끝나면 발레나 수영 학원을 가고 있었다. 내가 직장에서 돌아오는 시간과 맞추려면 하루에 세 군데의 학원을 돌아야 했지만 학습 학원이 아니니까,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아이도 곧잘 따라와 주었다. 주말에는 내가 잠시라도 쉬고 싶어 아이를 댄스 학원에 보냈고, 아이는 그렇게 음미체의 신동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 아이가 내 앞에서 엉엉 운 적이 있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을 하고 아이를 만났다.
나는 요가를 가야 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발레를 가야 하는데 발레를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나는 어떻게든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렇게 다니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소은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엄마, 나는 뭐든 잘하고 싶단 말이야.
나는 피아노도 잘해서 콩쿠르도 나가고 싶고
수영도 잘해서 수영 대회도 나가고 싶고
미술도 잘해서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고
댄스도 잘해서 응원단이 되고 싶어.
그런데 나는 발레는 못하겠어. 발레는 다리 찢기도 힘들고, 어렵단 말이야. 엉엉엉."
아이의 속마음이 이런 거였구나. 내 입장에서는 아이의 예체능 학원들이 그저 아이의 취미 생활을 넓혀 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이에게는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뭐든 잘 해내고 싶고, 그만큼 꿈도 욕심도 많았을 텐데. 공부가 아니면 부담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건 엄마의 착각이었던 것.
"소은아, 꼭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모든 걸 잘할 필요는 없어. 발레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엄마는 소은이가 어떤 것이든 즐겁게 했으면 좋겠어."
나는 아이를 달래어 겨우 발레를 들여보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 후로도 우리가 동네를 이사하기 전까지, 소은이는 계속 발레 학원을 다녀야 했다. 발레를 대신할 다른 학원을 찾지 못했고, 그렇다고 엄마가 요가를 포기할 수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소은이는 눈치챘을지 모른다.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고, 잘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해야 하는 게 인생이란 걸.
어쩔 수 없지.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니까.
어쩌면 인생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소은이와 내가 매일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더 이해해 가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이 시간들이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이지 않을까.
가끔은 발레를 가지 않아도 되고, 요가도 하루쯤은 쉬어도 괜찮다. 모든 걸 잘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서로 보듬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소은이에게 "엄마도 힘들어."라고 말하던 오늘처럼 앞으로도 가끔은 내 약한 마음을 아이에게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럼 소은이 역시 "인생이 원래 그런 거야."라고, 세상 다 산 듯한 말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들 사이에서도, 소은이와 내가 함께 걷는 이 하루하루가 결국 우리의 인생을 조금씩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리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나는 소은이의 손을 잡고 속삭인다.
"소은아, 우리 오늘도 참 잘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