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엄마, 나 어제 무서운 꿈 꿨어.”
“무슨 꿈?”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는 꿈.”
토요일 아침, 숲 체험을 가기 전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여느 엄마라면 “꿈은 꿈일 뿐이야.” 하고 웃어넘겼을지 모르지만, 암을 경험한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이는 왜 갑자기 그런 꿈을 꾼 걸까?
“그래? 꿈은 반대라잖아. 엄마 오래 살 건가 보다.”
당황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침착하게 말했다.
“엄마, 엄마는 안 죽을 거지? 절대 죽으면 안 돼.”
“그럼. 엄마는 소은이 곁에서 오래오래 살 거야.”
“아니, 오래가 아니라 영원히 죽지 마.”
“알았어. 엄마는 절대 안 죽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의 작은 가슴이 여전히 쿵쾅거렸다. 그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흘렀다.
문득, 4년 전 암을 진단받았던 날이 떠올랐다. 한밤중, 아이를 생각하며 소리 없이 울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제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단어가 우리 앞에 스치기만 해도 마음은 바다처럼 출렁인다.
오늘처럼 아이의 무심한 한마디에도 두려움이 밀려온다. 언젠가 소은이가 내가 아팠던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아이는 어떤 마음일까? 엄마가 암에 걸렸었다는 사실이, 다시 아플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아이의 마음을 짓누르진 않을까?
나는 아이에게 내 병을 일부러 숨긴 적은 없다. 그저, 아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알지 못했을 뿐이다. 암이 뭔지, 병이 뭔지 모를 그 시절에 아이는 엄마의 투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다른 엄마들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에게 암 투병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책으로도 썼고, 방송과 유튜브에서도 내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은 분명 나에게는 치유였고,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는 위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문득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조금 더 오래 아이에게 비밀로 남겨둘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지난날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선택이 과연 아이를 위한 길이었는지는 자신이 없다. 언젠가 소은이가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이의 마음이 상처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날이 되면 나는 오늘처럼 아이를 안고 말할 것이다.
“괜찮아, 엄마는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너와 함께 있잖아. 엄마는 절대 너를 두고 가지 않아.”
그 말이 비록 지킬 수 없는 약속일지라도, 나는 아이와 한 약속을 하루라도 더 오래 지키기 위해 매일을 살아간다. 언젠가는 아이도 죽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삶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하늘나라에 가야 할 날도 올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부디 아주 아주 먼 훗날이기를. 아이가 더는 부모가 전부가 아닌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을 때. 아이의 인생에 엄마보다, 아빠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생긴 다음이기를.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 하나의 약속을 다짐한다. ‘영원히’라는 말을 지킬 수 없다면, ‘오늘’을 영원처럼 충실히 살아내겠다고. 아이의 작고 따뜻한 손을 하루에 한 번 더 꼭 잡고, “엄마 여기 있어.”라는 말을 열두 번쯤 더 건네며, 우리에게 허락된 평범한 날들을 묵묵히 쌓아 올리겠다고.
그리고 나의 신께 기도한다.
'하느님, 부디 서두르지 말아 주세요. 제가 아이 곁에서, 그 믿음을 지켜주는 엄마로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처럼 따뜻한 품으로 아이를 안아줄 수 있도록, 그 날이 아주 아주 먼 훗날이 되도록 저를 붙들어 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