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울고 웃는 삶의 결말은.
마르세유에 집을 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꿈에 부풀기도 전, 새로 받은 스타트업 오퍼가 일 시작도 전에 취소가 되었다. 나는 덜컥 실업자가 되었다. 그 와중에 새로 산 마르세유 집에서 페인트칠을 하다가 창문에 머리를 부딪혀 꿰매는 사고가 있지를 않나, 지나가던 오토바이에 치일 뻔 하지 않나. 아무리 좋은 일에 마가 끼는 법이라고 했지만, 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힘든 일을 너무 한꺼번에 겪는 건 반갑지 않다. 대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걸까 하는 생각이 계속 커져갔다.
'잘 다니던 직장은 왜 관뒀을까,'
'왜 지금 우리는 베를린의 집을 처리도 못한채 마르세유에 집을 샀을까,'
'마르세유 집 페인트칠을 왜 우리가 한다고 설쳐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한 달 동안 나는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다. 내 상황을 안 이전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이 꾸준히 내 이력서를 본인들의 회사에 추천해주었다. 베를린의 오래된 인맥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워낙 한 회사마다 면접 과정이 7단계는 있었기 때문에 면접을 여러군데 보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새로 산 집 페인트칠을 하다가 면접을 보는 상황이 매일 같이 이어졌다.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새로 집을 사느라 들어간 목돈때문에 현금이 필요했으므로, 마냥 실직된 상태로 있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악순환도 끝은 있었고, 원래 모든 일은 터닝포인트가 있는 법이다. 다행히 수많은 면접을 본 끝에, 독일에서 이름만 들어도 아는 기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한 직장은 다행히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더 다녀봐야 알 일이지만, 적어도 새로운 회사에서 오퍼를 받지 않았다면 나는 번아웃(burnout)이 왔던 전 직장을 관둘 용기도 없었을 것이며,새로운 회사의 오퍼가 취소되지 않았다면 나는 이보다 더 좋은 지금의 기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의 생활이 10년이 훨씬 넘어가는 이 시점에 그 동안 순간 순간 이같은 굴곡이 없지 않았고, 이 모든 굴곡은 우리나라가 아니어서 조금 더 많이 힘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호기롭게 다시 돌아왔던 스페인도, 끝내 스스로 받아낸 비자로 희망차게 시작했던 독일도, 집을 사기까지 한 프랑스에서도, 나는 항상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인종 차별을 겪고, 언어의 어려움을 겪고, 한국과 정반대로 대부분이 아날로그인 유럽. 그럼에도 이런 곳에 아직까지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이유는 아직까지는 이 곳이 더 내 마음에 들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나의 호기심이 다 풀리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다. 인생이 참 긴데, 굳이 한 국가에서만 살 필요는 없지 않냐는 나의 생각이 아직은 굳건해서일까.
유럽에 살면서 유럽인 파트너가 있다는 것은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있었다. 그의 가족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모일 때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항상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독일에 살아도 프랑스인이 살아가는데 편리한 점은 꽤 많았다.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던지, 유럽연합의 언어로 된 법률 조항들을 모국어로 읽어볼 수 있다던지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한 데 유럽인으로 묶여 통칭되는것을 그들은 비록 싫어할지라도, 아시아인들의 공통점이 있듯이 유럽인들의 공통점들도 한 몫했다.
음식을 먹을 때 후루룩 소리를 내지 않는 식예절은 지키면서 남이 밥을 먹고 있는데 그 앞에서 코를 팽 푸는 것은 괜찮고, 신발 신고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우리랑 비슷한데 왜 방바닥은 매일 닦지 않는지,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지 않고 왜 각종 허브티를 끓여마시는지, 크리스마스가 한국의 추석만큼이나 민족 대명절이라는 것, 왜 밥을 바로 먹지 않고 식전 아페호(Apero: 식전 음료나 가벼운 핑거푸드를 통해 1시간 정도 대화를 가지는 프랑스식 문화)를 하는지... 10년 전 내가 이 모든 것을 파악하는데 유럽인 파트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 덕에 유럽에 적응을 빨리하게 된 것도 있지만 말이다.
이제는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보다는 내 식대로 이들의 방식과 조화를 맞추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를 선택해서 그의 문화를 존중하듯이 그도 나를 선택한 만큼 나의 문화를 존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리고 우리는 꽤 제법 균형을 맞춰가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는 모른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우리 삶의 계획에 마르세유라는 도시는 없었고, 베를린에 오랜 시간을 살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페인 지중해를 꿈꿔왔지만 결론은 프랑스의 지중해가 되었듯이, 정말이지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
마르세유에 올 때마다 '여기 오길 너무 잘했다,' '베를린은 벌써 겨울인데 여긴 아직 여름이야,' '정말 살맛난다,'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그 와중에도 혹여나 내가 인종차별은 당하지 않을지, 소매치기를 당하지는 않을지, 매사 노심초사하면서도 햇빛 한줄기에 행복해하는 그를 보면 나도 기분이 좋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을 접고 한국에 갈지도, 아니면 정말 생각치도 못한 곳에 가서 살지도 모를 일이다. 새롭고 조금은 지치는 "도전들"을 이제는 나이가 들었으니 많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아직도 '내년에는 어떻게 지낼까,'를 고민하며 행복한 상상을 한다. 상상을 하다가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잠시 내려놓을 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즐기는 우리를 발견한다. 울고 웃는 순간들을 함께하며, 결말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가 되는 그런 여정을 여전히, 그리고 꾸준히 함께 걸어가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