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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다채 1호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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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 Jun 30. 2021

영화 속 인물의 글쓰기 조언 - 1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 <리틀 포레스터>

본 기사는 장윤석 님의 인터뷰에 대한 에디터의 답변입니다. 인터뷰이, 그리고 인터뷰이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Editor |홍이진



어젯밤에도 메모장에 글을 쓰듯이 인스타그램에 즉각적으로 올렸던 글과 사진을 하루도 안 가 바로 삭제하고,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은 블로그로 옮겼다. 예전 같으면 내 생각을 여과 없이 자유롭게 올렸겠지만, 언젠가부터 읽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솔직하게 올릴 수 없는 글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올리는 게시물을 보는 사람이 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글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나,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Eye-Tracking 기능을 통해 알게 되었다.


처음에 SNS를 할 때는 배움과 경험이라는 인풋을 글이라는 아웃풋으로 정리함으로써 후련해지고 싶어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히려 비밀이 없어지는 기분도 들었고, 타인이 나를 글만으로 다 판단해 버릴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점차 자유로워지기 위해 쓰는 글을 스스로가 검열하면서 내 자유를 내가 억압하기 시작했다.


(중략)


그런 내게 글쓰기 스승님들이 몇 분 계시는데 그건 바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다. 특히 다음에 나오는 4편의 영화는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비주류이자 소수에 속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들은 내가 글쓰기와 관련된 고민을 안고 있을 때면 내 안에서 튀어나와 말을 걸어주곤 했다.




호밀밭의 반항아 Rebel in the Rye, 2017


“출판은 영원히 못할 수도 있어.
여생을 거절당하며 보낼 수도 있어.
그러니 자신에게 물어봐야 돼.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평생을 글 쓰는 데에 바칠 수 있겠나.
그 대답이 ‘아니다’라면 밖으로 나가서 먹고 살 딴 방법을 찾아야 돼.
왜냐하면 진정한 작가가 아니니까.”

‘휘트 버넷 교수님께.
오래전 물어보셨던 질문에 답합니다.
네. 아무 보상이 없어도 이제 평생 글만 쓰겠어요.’
J.D.샐린저 올림.


작년에 영화관에서 봤던 《호밀밭의 반항아 (Rebel in the Rye, 2017)》는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실제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당시 ‘출판을 한 사람만이 작가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만난 영화였는데, “출판과 상관없이 글을 써나갈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작가야.”라는 대사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주인공 샐린저는 대학교를 두 번이나 중퇴하며 방황을 할 때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도, 전후 후유증의 고통 속에서도 출판과 상관없이 평생에 걸쳐 글을 써나간다. 그런 그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기 치유에 있었다.


그에게 있어 글은 유일하게 자신의 얘기를 아무런 편견 없이 들어주는 친구와도 같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수단이자 삶의 목적 그 자체였다.


샐린저는 이러한 자기 치유의 글쓰기 끝에 자전적 소설인 《호밀밭의 파수꾼》을 완성했고, 이 소설은 전 세계적으로 6,500만 부 이상이 팔리며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그는 세계적인 인기와 가족을 등지고 평생 은둔생활을 하며 생을 마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샐린저는 오로지 글을 통해서만 세계와 연결된 채로 살아갔고, 가까운 존재를 밀어내면서까지 글에 매달린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글은 혼자 있어야 쓸 수 있기에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고 밤과 고독을 찾던 내 모습이 겹쳐지면서 공감이 갔다.


글에 몰입하다 보면 경험 후에 글이 오는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경험을 만들면서 삶이 글의 수단이 될 때가 있다. 그럴 땐 삶을 위한 글이 아니라 글을 위한 삶을 살게 될까 봐, 글이 존재를 밀어낼까 봐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글쓰기를 위해 고독을 자처한 그의 삶이 외로웠을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했는데, 이 감정은 나만 느낀 게 아니었나 보다. 그의 생애를 보고 《굿윌 헌팅 (Good Will Hunting, 1997)》을 제작한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샐린저의 실화를 살짝 비틀어 은둔생활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유명 작가의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게 바로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다.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 2000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글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쓴 글보다 훨씬 나은 이유는 뭘까?
정말 최고의 순간이 언제인지 아나?
자신의 초안을 마치고 나서 그걸 혼자 읽어 볼 때지.
멍청한 놈들이, 자신은 평생 쓰지도 못할 작품을 가져다가 하루 만에 해체해 놓기 전에 말이야.
비평가들이 내가 정말 의도했던 것에 대해서 이거네 저거네 헛소리를 시작했을 때, 난 결심했지.
한 권으로 족하다고.”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 2000)》의 주인공, 윌리엄 포레스터는 단 한 권의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뒤 몇십 년간 은둔생활을 해나간다. 그러던 중 뉴욕의 할렘가에 사는 흑인 소년 자말이 은둔자의 정체를 알아내자는 친구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포레스터의 집에 잠입했다가 노트를 떨어트린 채 도망 나온다. 그런데 포레스터는 그 노트에 적혀있는 글을 통해 자말에게서 문학적 재능을 발견한다.


그 후 자말이 노트를 찾으러 집에 오자 포레스터는 혼내는 대신 글쓰기에 대해 알려주고, 그렇게 둘은 사제지간이 되어간다. 포레스터는 타자기로 필사할 때의 단조로운 리듬이 자신만의 단어를 떠올리게끔 도와준다며 꾸준한 습관의 힘을 강조하고, 뭘 써야 하냐는 자말의 질문에 우선 가슴으로 초안을 쓰고 머리로 다시 쓰라며 글쓰기의 자세를 알려준다. 그리고 포레스터 역시 제자의 재능을 끄집어내 주는 과정에서 은둔생활을 접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사실 스승인 포레스터에겐 글과 관련된 상처가 남아 있었다. 《호밀밭의 반항아》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인 만큼, 주인공 포레스터가 은둔생활을 시작한 주된 이유도 비평가들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작가가 몇 년에 걸쳐, 또는 전 생애를 바쳐서 쓴 작품이어도 비평가들은 한눈에 읽고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를 바로 평가해 버린다.


이는 비단 책을 쓴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현대인들 또한 글, 사진, 영상 등 자신만의 콘텐츠를 SNS상에 업로드하면서 댓글과 팔로워의 수, ‘좋아요’와 ‘하트’, ‘공감’의 숫자로 매일같이 평가를 받으며 살아간다. 어쩔 땐 무겁지 않게 ‘좋아요’나 ‘하트’로 공감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그 개수로 콘텐츠의 가치가 평가되는 걸 볼 때면 아쉽고 안타까울 때가 많다. 누군가의 진한 고뇌나 재치, 필력이 담긴 콘텐츠보다 유명인의 가십거리나 맛집에서 가볍게 찍은 사진의 반응이 더 좋을 때면 이 문장이 떠오르곤 한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페이스북의 주옥같은 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고작 좋아요 버튼 누르기라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의 평가는 작품이나 콘텐츠를 넘어 작가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필자 또한 타인이 내 글만 가지고 나를 판단해 버리진 않을까 고민이 될 때가 많다. 누구나 날마다 변해가기에 예전에 쓴 글 속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기도 하고, 어떤 글은 미래를 향하기에 지금의 내가 글보다 못할 때도 있고, 그 글이 내 전부가 아니라 나의 아주 작은 일부이거나 내가 아닌 상상의 세계일 때도 있다. 그렇기에 글에 쓰고 다짐한 만큼 살아가지 못해서 반성할 때도 있고, 반대로 글이 내 전부가 아닌데도 글에서의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게 느껴질 때면 괜히 서운하기도 하다.


가끔은 보이지 않는 것도 봐줬으면 싶고, 보이는 것보다 더 낫게 봐주길 바라고, 보이는 것도 때로는 대나무 숲처럼 그냥 받아들이고 넘겨줬으면 할 때가 있지만 그건 내 지나친 욕심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의 후련함과 부끄러움, 피드백을 기다릴 때의 설렘과 두려움. 그 사이사이를 오가며 글을 썼을 때 그 여백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참 고맙다.


자신의 글이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력과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면서 용기와 부끄러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가까운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진솔한 생각을 드러낸 후의 여파를 고민하는 글을 만날 때면 동질감이 느껴지고, 흔한 표현으로 폭풍 공감이 된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에 가까운 지인들의 인스타그램에서 읽었던 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 우울을 함부로 내비치고 있던 건 아닐지, 필요 없는 과잉 정보를 전시해서 소중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겁이 납니다.’, ‘저는 살면서 진지충이라는 말을 꽤나 많이 들어왔어요. 너무 진지해서, 너무 생각이 많아서, 너무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래서 한때 가볍게 말하려 노력했고, 적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했고, 둔감해지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었어요.’


이런 용기와 부끄러움 사이에서의 갈등은 글을 업으로 삼는 작가와 표현이 곧 삶인 아티스트들도 가진 고민이었다. 《쓰기의 말들》을 쓴 은유 작가님은 ‘자기가 쓴 이상한 글을 봐야 하는 형벌을 면하려면 계속 다음 문장을 쓰는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고, 구혜선 작가님은 한 인터뷰에서 “전시회를 하고 나면 늘 창피한 게 나를 보여주는 일인 것 같아요. 준비할 때 마음과 다르죠. 영화도 음악도 그림도 공개 후엔 '왜 했을까, 왜 했지' 후회하게 돼요. 그러면서도 뭔가 계속하고 있으니 이런 날이 왔겠죠?”라는 말을 남겼다.


구혜선 작가님은 이어서 ‘20대 초반에는 용기를 내서 나를 표현하고, 20대 후반에는 관객의 공감을 이끌기 위해 소통에 힘썼다면, 30대가 된 지금은 반대로 관객의 생각이 궁금하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생겼다’고 고백하며 예술의 초점이 바깥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얘기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다채 1호는 인터뷰이의 지갑을 통해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각자의 크고 작은 다름이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사회를 꿈꿉니다.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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