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다채 1호 07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채 Jul 05. 2021

기록, 흔들리는 나를 기억하는 방법

정재은 님의 지갑 인터뷰 - 1

인터뷰이의 지갑

이거를 언제 샀냐면, 일본 여행 갈 때 샀어요. ‘뭐가 제일 나 같을까? 뭐가 제일 가격대도 나랑 맞을까?’ 그런 생각 하다가 샀던 거 같아요. 이 빨간색이랑 도트가 제가 딱 좋아하는 디자인. 제가 좀 유치한 걸 좋아하거든요. (웃음)



항상 그런 얘기들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무한한 애정, 무한한 사랑. 그런 거에 관련된 이야기.




하필 이 캐릭터로 고르신 이유가 있나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되게 좋아해 가지고요. 유치하다고 욕먹기는 했는데, 저는 마음에 들어요. 2년 넘게 썼어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왜 좋아하세요?


제가 다른 영화 보는 거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작품 같은 거 즐길 때 책은 본인 속도대로, 흐름대로 보면 되는데 영화는 단시간 내에 스토리를 다 봐야 하잖아요.


그래서 집중도 잘 안 되고 어렵다고 해야 하나? 근데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스토리가 깔끔하고 좀 쉬우니까. 그런 점이 좋아요.


그게 어린이 콘텐츠의 매력인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동화책도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 그래요? 이상한 게 저도 비교적 최근 들어서 동화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중고 서점 가서 동화책을 보는데 진짜 좋은 내용이 너무 많더라고요. 제가 얼마 전에 본 책은 별 내용 아니었는데도 마음에 와닿고 눈물이 글썽하는 거예요.


진짜 별 내용 아니었어요. 《I Love you Through And Through》라는 책이었는데, ‘나는 네가 울 때도 좋고, 웃을 때도 좋고, 장난칠 때도 좋다.’ 그런 내용이었어요. 갑자기 막 울컥하더라고요.


또 어떤 동화책 좋아하세요?


지금 딱히 떠오르는 건 없는 것 같은데. 음… 항상 그런 얘기들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무한한 애정, 무한한 사랑. 그런 거에 관련된 이야기.



상담 선생님이 제가 너무 쓸데없이 공감을 많이 해서
사회 문제를 견딜 수가 없는 거래요.

지갑 곳곳에서 책을 좋아하시는 게 느껴져요. 책이랑 인연을 쌓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2년 전에 친한 오빠가 독서모임을 하자고 한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책을 조금씩 읽어 나갔는데 그게 진짜 좋더라고요. 쉽고 단순하게 읽을만한 책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책을 읽는 행위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힘이 덜 드는 행위잖아요. 운동하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은데 책은 그냥 누워서도 읽을 수 있고 하니까.


독서 모임 덕분에 책에 흥미를 붙이신 거네요. 그러면 그전에는 독서에 관심이 없으셨나요?


전에도 읽긴 읽었는데, 에세이만 읽었어요. 다른 건 와닿지도 않고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특히 소설 같은 거는.


아 정말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랑 동화책 좋아한다고 하셔서 소설도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좀 다른 거 같아요. 어떤 소설들은 너무 깊은 상황이나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내잖아요. 어둡고 폭력적으로. 그런 것까지는 감당할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하나? 어두운 거 잘 못 보거든요. 병적으로 못 봐요.


뉴스도 못 보고 이래요. 뉴스는 꼭 나쁜 얘기만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인 거예요. 세상에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거를 견디는 게 좀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왜 힘들었을까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우울증 진단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상담을 많이 받았었는데, 상담 선생님이 제가 너무 쓸데없이 공감을 많이 해서 사회문제를 견딜 수가 없는 거래요.


‘사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니 말도 안 돼. 어떡하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 혹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나면 어떡하지?’ 이렇게 생각하게 되니까….


(놀라며) 정말 신기하네요. 저도 그래요.


한 번은 상담 선생님이 어떻게 맨날 안 좋은 얘기만 듣고 사시는지 문득 궁금한 거예요. 저는 이런 얘기를 제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거든요.


그래서 “선생님은 심각한 사람들 얘기 들으면서 어떻게 살아요?”라고 물어봤는데 선생님이 엄청 웃으셨어요. 그런 말 해주는 환자는 처음이라고.


재은 님은 그것조차 주변에 공감하고 있는 거였네요.


그러니까요. 이게 문제래요. 선생님이 “재은 씨, 저는 이거 돈 받고 하는 일이에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기는 한숨 한 번 크게 쉬면 된다고. 어차피 일이니까. 진짜 생각해보니까 제가 알 바는 아니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요새는 공감하는 걸 좀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건 내 일이 아니고, 이게 내 일이다.’라는 구분이 있어야 아무 때나 감정이 흔들리지 않으니까.


최근에 받은 상담에서도 본인이 약해져 있어서 이런저런 말에 흔들리고, 예민해지고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재은 님이랑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빠가 “나이 먹을수록 경험이 쌓이고 자기 자신을 더 믿게 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저도 우선 저 자신을 믿는 연습을 하는 중이에요. 주관이 확실하면 주변이 아무리 흔들려도 저는 안 흔들리는데, 제가 약해져 있으면 주변이 흔들린다는 거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내가 약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예를 들면 자신감이 떨어져 있거나 자존감이 바닥인 것? 아니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것.


아무래도 그런 불안한 생각이 들 땐 일단 그만 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그만 생각할 수 있을 때가 있다고 하잖아요. 혹시 그런 시도를 하시나요?


저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더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엄청 부러워요. 그래도 요즘에는 너무 깊게 빠지니까 나오려는 시도 같은 거를 하긴 해요.


예를 들면 그럴 때 해야 할 행동 리스트를 생각해놓거든요. 빨리 잠을 잔다거나, 좋아하는 드라마를 본다거나. 작년에는 마라톤도 몇 번 나가보고, PT를 열심히 다녔고. 아, 그리고 춤을 췄어요. 케이팝 따라 추고 인스타그램에 조금씩 올리고 그랬어요.


요즘에도 그 행동 리스트 중에서 실천하고 있는 게 있나요?


요즘엔 너무 우울하다 보니까 운동은 못 하겠어요. 그냥 해야지, 해야지… 그런 상태? 하는 게 좋은 건 알고 있어도 아, 진짜 못 해 먹겠다. 요즘에는 진짜 좀 우울하거든요.


그래도 그 상태를 잘 버텨야겠죠. 그냥 시간이 가게끔 버텨내야 해요.



글 쓰는 것 자체가 도움이 많이 돼요.
저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이건 제가 올해 초까지 했던 프로젝트예요. 우울증이 있는 6명이 에세이를 쓰는 프로젝트인데, 제가 그중 마지막 글을 썼어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텀블벅에서 하솜 님이 우울증 에세이를 단독으로 출판하신 거를 보게 되었어요. 너무 감명 깊은 거예요.


혼자 솔직하게 쓰신 거를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연락을 드렸는데, “이런 프로젝트 하고 있는데 생각 있으시면 같이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같이하게 됐어요. 그게 《우울한 우리들》.


그럼 이 프로젝트의 시기가…?


작년 여름부터 시작했어요. 되게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던 거 같아요. 사실 아직까지 하솜님 말고 다른 작가분들은 대화도 나눠본 적 없거든요. 근데 한 책에 글이 다 실려 있는 거잖아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같은 감정에 대해서도 이렇게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어떨 때는 ‘나랑 되게 비슷하다.’ 하면서 공감도 많이 돼요. 그래서 이후로도 책 만드는 거는 계속하고 싶어요. 지금도 준비 중이에요. 제 책 하나 만드는 거.


지금 준비 중인 책은 어떤 거예요?


조울증에 관한 책이에요. 제가 중3 때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가 작년 이맘때쯤에 조울증인 걸로 판명이 났거든요. 저한테 ‘울’의 상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조’의 상태도 있었던 거예요.


울’의 상태와 ‘조’의 상태요?


‘조’의 상태일 때는 너무 신나고 활발하고, 이거 해도 잘 되겠지, 저거 해도 잘 되겠지. 상상이 엄청 잘 돼요.


반대로 ‘울’의 상태일 때는 ‘나는 이거 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무너지는 느낌이에요. 나는 못 할

거야. 이렇게. 자신감이 엄청나게 없어져요.


감정의 양극단을 느끼는 거네요.


네. 그래서 더더욱 조울증에 관한 책을 내보고 싶었어요.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면 조울증이 한 글자씩 한 챕터가 돼요.


‘조’는 기쁜 감정에 관해 쓴 거, ‘울’은 우울함에 관해 쓴 거, ‘증’은 병원에 대한 거. 병에 대한 객관적인 감정.


책을 만드는 것이 재은 님한테 큰 힘을 주나 봐요. 특히 쓰는 행위, 그 자체로 치유를 하고 계신 느낌이에요.


너무 기쁠 때나 슬플 때 표출을 해야 하는데 사람한테 표출하는 거는 한계가 있는 거 같아요. 남이 내 마음을 다 알아주는 것도 불가능하고. 근데 그거를 글로 쓰고, 쓴 글을 읽어보고 하면 제 감정을 인정하는 과정이 돼요. 


‘이게 무슨 감정이지?’라고 느낄 때 글로 써 놓으면 정리가 되는 거죠. 그래서 글 쓰는 것 자체가 도움이 많이 돼요. 저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글을 통해 나를 제3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는 과정이 힐링이 되는 거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네 맞아요. 또 이런 벅찬 감정 속에서 새로운 표현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럼 그때 오는 희열도 있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서 제가 얼마 전에 ‘꿈 너머 꿈 정도의 거리감’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냈는데 뭔가 그 표현을 생각해낸 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오… 예술가의 정신이 느껴져요.


그런가? (웃음) 민망하네요. 너무 우울할 때는 제가 기쁠 때 써놨던 글을 보면서 “아, 이럴 때도 내가 기분 좋을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양극의 감정들이 서로를 기억을 못 하는 게 조울증의 특징이거든요.


이게 약 때문인지 아니면 병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기억력이 진짜로 많이 안 좋아져요. 선생님이랑 상담하면서 저는 “저 그런 적 없는데요?” 하고, 선생님은 “재은 씨 저랑 분명히 얘기했어요.” 이런 적도 많아요. 제가 만약 지금 우울하면 기쁠 때의 저는 없는 사람이 되는 거죠.


기억해야 하니까 일부러 기록해 놓는 거네요.


네. 기록의 의미도 있는 거예요. 글쓰기 전에는 기록을 안 해 놨으니까 몰랐거든요? 근데 요즘에 다시 보면 기쁠 때 써 놓은 글들이 너무 신기해요.


그 기쁜 감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한테 도움이 되거든요. ‘아, 나는 되게 다양한 모습이 있지?’ 이렇게. 저의 기록들이 그나마 저를 좀 지켜주는 거 같아요.








다음 화에서 계속.


다채 1호는 인터뷰이의 지갑을 통해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각자의 크고 작은 다름이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사회를 꿈꿉니다. Instagram
이전 06화 영화 속 인물의 글쓰기 조언 -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