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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다채 1호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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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채 Jul 05. 2021

'조'와 '울'의 균형 잡기

정재은 님의 지갑 인터뷰 - 2

제가 봤을 때는 기쁨이나 슬픔이나
저한테 똑같이 ‘해(害)’예요.

이건 제 친구가 써준 건데요, 어디에는 돈을 얼마 쓰고 어디에는 얼마 쓰라는 걸 정리해 준 거예요.


친구가요? 왜요?


제가 조증일 때 절제가 안 돼서 하루에 약속을 3개씩 잡고 그랬거든요. 약속을 많이 잡으니까 돈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친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용돈 기입장 검사하듯이 관리를 해주고 있어요. 진짜 엄청 고마운 친구예요.


(감탄) 와 진짜 좋은 친구네요. 왜 조증일 때 약속을 많이 잡았나요?


저는 기쁠 때 이것저것 하게 돼요. 나중에 감당을 못하더라도 일단 중독처럼 다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쇼핑 중독. “내가 이렇게 힘들었으니까 이것쯤은!” 하면서 보상심리로 물건을 엄청나게 사버려요. 아니면 술을 많이 마셨던 적도 있고.


그리고 관계 중독이라고 해야 하나… 이 사람 저 사람 맨날 만나고… 조울증 진단받고 선생님이 첫 번째 하신 말이 “약속 좀 잡지 마라.” 였어요.


조증이랑 울증의 균형을 잡아야 하니까 그런 거였어요?


네. 맞아요. 근데 너무 안 지켜지는 거예요. 친구가 외국으로 금방 나간다는데 어떻게 안 만나요… (속상) 모르겠어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그 적당히라는 게 조절이 잘 안 돼서… 제가 봤을 때는 기쁨이나 슬픔이나 저한테 똑같이 ‘해(害)’예요. 엄청 ‘해’.


조증일 때 일을 벌여놓으면 내 시간을 가지거나 쉬지를 못하니까 울증일 때 힘들어지는 거죠. 일단 사람을 만나면 챙겨야 하잖아요. 이 사람 안 챙기면 큰일 날 거 같고 그러니까…


그럼 보통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챙겨주세요?


예를 하나 들면… (웃음) 저희 삼촌이 목공예 하시는 분인데 장사가 너무 안된 적이 있어요. 그때 할머니가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하, 정말 아들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저러고 있을까. (웃음)


그래서 제가 총대를 멨어요. 텀블벅 해봤다고 그걸 한번 해보자고 한 거예요. 근데 진짜 그게 엄청 크나큰 실수였어요.


왜요?


삼촌은 문자도 할 줄 모르시거든요? 운전도 못 하시고. 저는 운전을 하니까 강원도까지 가서 어떻게 하는지 다 알려드려야 했고, 맨날 삼촌이랑 통화하고 그랬어요. 하다 보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텀블벅 사이트에 올릴 사진을 하나하나 찍고 작품화시키는 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저 진짜 의사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어요. (웃음)


(웃음) 의사 선생님이 단호하시네요.


맞아요. 의사 선생님이 맨날 뼈 때리시거든요. 갔다 오면 다 털려요. 그날도 “재은 씨 앞가림이나 해야 되는데 누가 누굴 돕냐.”고 하시고… 진짜 아차 싶었어요.


그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저는 이것도 저것도 다 하고 싶다. 그럼 어떻게 하냐.”라고 여쭤봤었거든요? 근데 의사 선생님이 사람의 능력은 한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싶다고 다 하는 사람이 재은 씨 주변에 누가 있냐고 말해 보라고. 근데 제가 언제 박진영이 자기 관리 엄청 철저히 하는 거를 봤거든요?


JYP???


네. 그래서 제가 "JYP요" 이렇게 대답했어요. 말하고 나니까 저도 너무 웃겨가지고. (웃음)


(박장대소)


결국 혼났어요. (웃음)


(웃음) 사실 이것저것 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하고 싶은 이유가 뭘까요?


모르겠어요. 너무 절실해져요. 이걸 하면 내 인생이 변할 것 같고. 엄청나게 깨달음을 얻을 거 같고.


제 친구들이 장난으로 저한테 ‘의미 부여충’이라는 말 많이 하거든요. 뭐만 하면 너무 좋다고 하고 자그마한 걸 봐도 “이것 봐 멋지지 않아?” 엄청 자주 그러거든요.


그럼 하고 싶었던 일들을 실제로 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드나요?


‘역시 하길 너무 잘했어.’ 이렇게 생각해요. 근데 실질적으로 크게 바뀌는 부분은 없어요. 요즘에는 그래서 그것보다 실속이 뭔지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지금 꼭 필요한 것을 챙겨야겠다… 의사 선생님이 항상 저한테 강조하시는 게 우선순위거든요.


뭐가 지금 우선순위인지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생각하기’라고 쓴 포스트잇을 어디서든 보이게 붙여놨어요. 핸드폰 배경화면에도 해놓고. 그런 식으로 좀 해야 되겠더라고요.



세상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시각도 가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계속 절망하게 됐던 것 같아요.

아이유 팬이신가 봐요!


네. (웃음) 데뷔 때부터 좋아했어요. 진짜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아이유가 성격상 절대 안 울기로 유명해요. 강인하다고 해야 하나?


아이유의 그런 성격에서 힘을 많이 얻는 것 같아요. 나도 저렇게 돼야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야지. 아이유가 효리네 민박에 나와서 자기는 기쁘면 감정을 차분하게 조절한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어요.


나는 기쁠 때 그냥 막 기쁘느라 바쁜데 어떻게 감정 조절을 해내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사람이 그런 걸 어떻게 해내지? 그런 것 때문에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아이유의 강인한 모습이 좋은 거네요? 그러고 보니 재은 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강인한 거 같아요. 자기 통제가 가능하고. 의사 선생님도 그렇고 메모 만들어준 친구도 그렇네요.


네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그럼 혹시 재은 님이랑 비슷한 성향을 가진 친구도 만나보셨나요?


비교적 최근에 친해진 친구 중에 저랑 비슷한 친구가 있어요. 감정 기복 심하고, 슬플 때 엄청 슬퍼 버리고 신날 때 엄청 신나고 이런 친구요.


그런데 되게 신기한 게, 그런 친구를 보면서 제가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행동의 기준이 생기게 됐어요. 아 저럴 때는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내가 저랬구나. 그런 거?


서로 감정을 막 쏟아내 버리지는 않으셨어요?


네. 예전에는 제가 다 쏟아내는 편이었는데 요즘에는 이게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을 지키려고 노력해요. 그런 이유로 친구가 떠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너무 힘들었어요.


슬픔을 나눴다고 없어진 게 아니라 배가 됐다는 느낌이 계속 드는 거예요.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 경험이 시간이 지나도 안 잊히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진짜 조심해야겠다. 나의 다양하고 깊은 감정을 적당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요. 대안으로 글을 쓰는 것도 좀 있어요.


저는 그게 재은 님이 성장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요.


성장하는 것 같기는 해요. 근데 저는 그 과정 안에 있으니까 성장하고 있다고 잘 못 느끼는 거 같아요. 그래도 이게 맞는다는 느낌은 들어요.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가고 계신 거네요. 그럼 혹시 예전에는 과도하게 공감해서 시도조차 못 했던 것들 중에 조금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게 있을까요?


뉴스. 예전에는 아예 안 봤는데요. 그래도 뉴스는 봐야 할 것 같더라고요. 어차피 그것도 현실이니까. 찾아보지는 않지만 들리는 걸 막지는 않아요. 저는 세상 사는 게 전부 아름답다고 생각했거든요. 엄청 행복한 거라고.


근데 그거를 깨면서 오히려 받아들여졌어요. ‘세상은 행복해야 하는데 왜 이런 거야? 알고 싶지도 않아.’ 이랬는데 세상은 원래 살기 힘든 거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그래 뭐… 그렇구나.’로 바뀐 거죠.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오히려 본인이 만들어 낸 것 아닐까요?


오 맞아요. 진짜 맞아요. 제가 예전에 지나친 자기 긍정은 독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자꾸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걸 그만하라고. 자꾸 할 수 있다고 하지 말고 너무 착한 사람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너무 긍정적으로만 생각해서 역효과가 났던 것 같아요.


왜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걸까요?


그게 약간 어렸을 때 읽어온 자기개발서들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 자기개발서가 한창 유행할 때가 있었어요. 2009년쯤 《무지개 원리》랑 《시크릿》 같은 책이 엄청 뜨던 때였는데, 그거에 빠져서 그런 책들을 맹목적으로 읽었거든요.


특히 《시크릿》. 그 책 후반부에 뉴스 보지 말라고 나와요. 부정적인 현상을 보지도 마라. 그래서 더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거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얘긴데 그때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세상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시각도 가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계속 절망하게 됐던 것 같아요.


외면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닌데. 어떻게 보면 현실을 간과했던 거네요.


네. 저는 그래서 요즘 무조건적인 긍정은 진짜 독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우선 객관적으로 현상을 바라보고 이로운 점을 긍정해야 되는데 무분별하게 긍정하면 나중에 일이 잘 안 됐을 때 더 힘들거든요.




다음 화에서 계속.


다채 1호는 인터뷰이의 지갑을 통해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각자의 크고 작은 다름이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사회를 꿈꿉니다.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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