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편을 만난 건 서른한 살 때였다. 남편이 나보다 두 살 더 많으니 남편은 그때 서른셋, 청년이었다.
남편은 얼굴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었는데 중년의 아저씨 같은 행동을 많이 했다. 밥을 먹은 후에 물을 오물거려 입을 휑궜고 내가 반찬 국물을 묻혀가며 먹다가 남긴 밥을 가져가 아무렇지 않게 먹어 치웠다. 밥을 먹으면서는 항상 반주를 하고 싶어 했고 술은 꼭 소주만 찾았다.
그래서 나는 휴대폰에 남편을 '배씨 아저씨'라고 저장해 놓았었다.
결혼 직후 내 휴대폰에 남편이 뭐라고 저장되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트나 뭐, 그런 걸로 저장해 두었었던 것 같다. 그때도 남편은 나룰 자주 기다리게 했지만, 그 기다림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좋은 시절이 있었다.
눈에 콩깍지가 끼어있던 시절. 그노무 콩깍지는 낄 거면 빠지지나 말지, 눈에 딱 부착되어 있는 줄만 알았던 콩깍지가 힘없이 툭, 빠지면서 나의 비극은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신혼이 지나고 나서는 남편을 '배트맨'이라고 저장해 두었었다. 남편이 왜 자신을 그렇게 저장해 두었냐고 물었을 때는 남편이 배트맨 영화의 주인공인 크리스천 베일을 닮아서 그랬다고 얼버무렸지만, 그리고 사실 그게 영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나는 남편이, 영웅처럼 강해지기를 바랐다. 부모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거나 헐크처럼 힘이 세지지 못하는, 극히 인간적인 어둠의 기사(다크 나이트)이자 슈퍼히어로 배트맨 말이다.
나는 남편이 배트맨이 되어 자기가 만든 수렁에서 나를 빼내주길 원했다. 물론 배트맨의 본캐인 브루스 웨인이 고담시 최고 재벌이라는 것도 내가 남편을 배트맨이라고 저장해 놓은 이유 중 하나가 되기는 했다.
남편이 배트맨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남편을 점 하나로 저장해 놓았었다. 점 하나, 마침표 말이다. 남편과의 관계를 그만 끝마치고 싶었다. 반년 정도, 남편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내 휴대폰에는 마침표가 떴다. 마침표를 확인하며 이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를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그리고 이제는 남편의 번호를 어떤 것으로도 저장해놓지 않았다. 우리는, 처음부터 번호를 교환할 필요가 없었던 사이, 모르는 사이였으면 좋았었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지난 월요일에 있었던 교통사고 차량 수리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왔다. 처음에는 그릴과 범퍼 정도만 교체하면 될 거라던 정비소 아저씨는, 차를 맡기고 가던 우리를 다시 불러 차량 앞부분이 다 돌아가서 견적이 생각보다 많이 나올 거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의 중첩된 선택으로 사고가 난 것이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서로를 선택한 것이고 시간을 돌려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통사고가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가 부부라는 것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부부였던 관계는 될 수 있어도 말이다. 그러니 휴대폰에 남편의 이름을 저장해놓지 않은 것은 단순한 나의 바람,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 다만 순수한 바람이다.
남편을 만나 내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생각보다 많아 놀랐지만, 아니 지금도 꾸준히 놀라고 있는 중이지만, 찰나의 순간 웃을 수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싶다. 교통사고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처럼.
찰나의 웃음.
그 웃음의 힘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