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5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커서가 깜빡인다. 나는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둔 채 한참을 멈춰있다. 커서가 깜빡일 때마다 내 심장도 덩달아 깜빡인다. 아무래도 커피 한잔이 필요할 듯하다. 진한 커피 향을 맡으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래, 이거지... 살 것 같네.'
정말 커피 한 모금에 살 것 같아진 걸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힘겨움을 외면하려고 커피라는 도피처를 찾은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커피를 마시는 순간 나는 더 날카롭고 예민해진다. 모든 감각들을 곤두세워 내가 마주하는 혹은 마주했던 감정과 상황들을 파고든다. 그렇게 글의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의 심장소리가 귀에 울리고 호흡이 점점 더 가빠진다. 모두가 잠든 밤 속에서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나를 책망이라도 하듯 심장이 쿵쾅거린다. 내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따스한 발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도무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 눈을 뜰 수 없다는 생각에 불현듯 사로잡혔다. 불안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어지자 심장이 조여 오면서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응급실로 달려갔다. 혈압 및 심장박동수는 모두 정상이었다. 응급실에서는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날이 밝으면 심장내과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고, 그래도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정신과에 가보기를 권유했다.
다행히도(정신과에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어서인지) 심장내과에서 받은 정밀검사결과에 부정맥이라는 진단명이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내 심장을 중고차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 중고차에서 발견된 아주 작은 불량품정도의 부정맥이지만 마라톤 10킬로까지 달려도 문제없을 정도의 기능을 가진 심장이라 했다.
무던해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에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일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 말투, 상황들을 모두 신경 쓰고 이해하려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속으로 되뇐다.
'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
그러나 나와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취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평상시와는 다른 표정, 말투, 행동들이 나의 레이더에 잘 걸려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애써 반응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내 심장은 나의 의지와는 별개로 반응한다.
콩닥콩닥... 쿵쿵쿵 쿵쿵...
어쩌면 내가 흔들리지 않고 초연해지고자 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아닐까.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꽃잎은 바람에 나부끼면서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다음 해에 예쁜 꽃을 피운다. 흔들리는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의 예민함을 부정하기보다 받아들인다면, 흔들리는 바람에 맞서 버티기보다 몸을 맡긴다면,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서기보다 파도와 함께 바다가 되어 파도에 올라탄다면. 조금은 덜 지치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이 삶의 여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너무 예민해서 힘들어하기보다 그 예민함을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불어오는 바람이 어루만지는 숨결을 잘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손끝에 느껴지는 꽃잎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이런 나를 축복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오늘에 감사하며.
너무 예민해서 힘든 나에게,
나의 존재자체가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 것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