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WWOOF
. 30. 2023
2023년 봄, 나는 독립문공원의 홍매화가 활짝 피었던 3월 하순경에 프랑스로 WWOOF를 떠났다가, 파리분지의 황금빛 밀밭을 바라보며 6월 말에 돌아왔다.
여행후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참 후의 일이다. 나는 내가 발견하게 된 이 멋진 경험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널리 말해주고 싶었다. 특히 WWOOF 여행 내내 한국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주제넘을지는 모르나 이 환상적인 여행방식을 알리는 일을 내가 거들어야겠다는 생각, 이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또한 SNS를 통해서 나와 여행을 동행하며 응원했던 지인들이 이 얘기들을 글로 써보라고 부추긴 것도 한몫을 했다.
나는 30년 가까이 기업에서 일했다. 지금은 3명의 대학생을 거느린 가장이다. 모든 직원이 모든 것을 다 걸고 분투해 주기를 요구하는 ‘회사생활’이란 애당초 나의 기질과는 잘 맞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힘겹게나마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극심한 궁핍을 경험해 본 사람은, 궁핍에 대한 두려움에 삶이 지배되기 마련이다. 경제적 궁핍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파리 유학시절에, 쉼과 노동을 조화롭게 엮어가려 애쓰는 프랑스인들의 삶을 엿보게 되었던 나는, 가족부양의 책무를 이행하는 회사생활 동안 내내, 끊임없이 담장 밖의 삶을 기웃거렸다.
마침내 내 앞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새 캔버스가 놓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인생의 후반기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아이들도 다들 대학생이 되었으니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갈 나이들이 되었다. 나는 이제야 온전히 내 마음대로 채워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인 문제는 여전히 걱정스러웠지만, 돈을 벌어서 해결해 낼 확률보다도 감내할 용기를 충전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사의 여행상품 중에는 세계적인 도시와 명소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기획된 훌륭한 여행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한두 달 정도의 충분한 휴가를 내기 어려운 직장인들이나, 짧은 시간 동안 기분전환을 하고 싶은 여행자들에게는 매우 적합한 프로그램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주 색다른 여행을 하고 싶었다. 촘촘히 짜인 일정에 맞춰 바쁘게 움직이는 여행보다는, 내가 직접 계획을 짜고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여행, 사람들과 교감하며 일상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저녁 무렵, 집 앞에 펼쳐진 풀밭 위의 벤치에 앉아 눈 덮인 알프스 산을 바라보며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꿈꾸었다.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하는 성찰의 여행이 되기를 바랐다. 나는 은퇴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엇에 마음을 쏟고, 무엇을 감내할 것인지, 생각을 정리하며 후반부 삶을 준비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전에 삶을 살아내야만 했고,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도 잘 알지 못한 채, 부모가 되고 자식을 낳아 길러 왔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실수와 방황으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한가지 이유는, 인간이란 실수를 통해서조차 좀처럼 배워 나가기가 어려운 존재라는 사실에 있다. 이 반복되는 오류는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는 이상, 노년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채 노년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폴 투르니에의 <노년의 의미>를 3년 동안 꼼꼼히 반복해서 읽었다. 내가 읽었던 노년에 관한 책들이 한결 같이 권고하는 것은, 늙는 것도 배우며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늘도 힘겨운 밥벌이에 나서야만 생계가 유지되는 고단한 이웃들에게는 여가라는 단어조차도 불편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건이 갖춰져 있는데도, 은퇴 후에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을 어찌할 바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일 년에 휴가 한 번 맘 편히 다녀오지 못한 채 수십 년간 일벌레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그렇게 학수고대해 왔던 쉼이 찾아왔는데도, 쉬는 것을 배우지 못한 가엾은 은퇴자들은 쉼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노동보다 쉼을 더 힘들어한다.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도 많다. 과연 일만 하는 것이 그렇게 좋을까?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쉼을 배우지 못한 탓이 아닐까. 느리게 사는 것, 고독을 마주하는 것, 가난하게 사는 것,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 속에 머리를 파묻고 도피하는 것이다.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 왔던 쉼을 위한 여행을 하고 싶었다.
WWOOF는 나에게 딱 들어맞는 여행 컨셉이었다. 나는 몇 년 전에 국내에서 이미 우프를 경험했던 터였다. 웅장한 건물들을 구경하러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삶을 들여다보는 여행, 돈들이지 않고도 느긋이 머물 수 있는 여행, 피곤하지 않고 쉼을 얻는 여행, 노동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는 여행, 자신을 다독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창문을 여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처음 시도했던 해외 WWOOF의 경험은 생각했던 것보다 강렬하고 인상 깊었다. 흥미진진했던 시간이었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좋은 것이란 연이어서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나는 이 새벽에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행복한 미소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틀림없이, 그 3개월의 여행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의 한 토막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서 나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생면부지의 낯선 이국인들의 삶에 끼어들 수 있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고, 함께 산에 오르며 고단한 삶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전 같지 않은 몸을 이끌고 오늘도 양 떼를 돌보기 위해 찬바람 부는 들판에 나가야만 하는 일상의 과업을 짊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길 위에 서 있는 고단한 나그네’로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젊은이들이건 은퇴자들이건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여행을 경험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막상 이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실상은 용기의 문제인데도, 우리는 흔히 다른 이유를 들어 그것을 변명하려 한다. 사실 해외 WWOOF는 건강상의 문제, 언어문제 등으로 인해 실행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와 의지만 있다면 굳이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서도 가능하다. 국내에서 WWOOF를 해 보았던 경험은 해외에서 WWOOF를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WWOOF가 더 활성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일 년에 수 십만 명의 외국 젊은이들이 이렇게 세계를 여행하며 우리나라에까지도 찾아오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국내 WWOOF 경험자를 만나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끝으로, 나의 서툰 글솜씨에 인내심이 부족한 독자들에게, 앞으로 주절주절 써 나아갈 내 글의 주제를 간단히 요약해 주는 친절을 베풀고 싶다.
‘용기를 내서 떠나라! 기대하지 못했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여행하는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시간이며,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