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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한 래몽 Sep 05. 2023

제로 창업으로 잘 먹고 잘 사는 법  

REMONG 1 - 프리하게 살고 싶어서



부모님의 이혼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갑자기 결정됐다. 사람이 기억을 인지하는 나이부터 부모님의 싸웠던 모습이 기억날 정도로 이미 예정된 결말을 향해 가는 시한폭탄 같은 과정이었다. 



사진: Unsplash의Nate Neelson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한무보가정의 자녀를 증명하는 서류를 학교에 제출해야 했다. 당시 다니던 중학교에서 나만 멀리 떨어진 학교라서 아는 사람도 없고, 괜히 소문이 날까 봐 조회 내내 애꿎은 서류만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드디어 조회시간이 끝나자 담임 선생님께 드렸다. '이게 뭐야?'라는 선생님 말에 작은 목소리로 '한부모가정 신청이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알겠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마저 지시사항을 전달하다가 잊은 채 교탁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나가셨다. 책상 위에는 고민의 흔적이 가득한 서류가 외롭게 남겨졌다.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기 전에 황급히 낚아채서 교무실로 찾아갔다. 



귀찮은 듯이 쳐다보는 선생님께 다시 서류를 주고 돌아오는 길에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어른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사진: Unsplash의Sasha  Freemind



나의 학창 시절은 학급 스트레스보다는 가족과 어른들 사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욱 컸다. 외부에서 오는 일들은 내가 세상에 사라져야 끝이 날 것 같았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 달라진 상황에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일이 많아졌다.



그중에서 우라 나라에서 특히 중요시 생각하는 밥 = 먹는 것(食)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았다. 저소득층을 위해 무상으로 주는 우유를 받는 학생을 조사하기 위해 눈 감고 해당하는 학생을 손을 들게 했다. 그리고 따로 불러서 맛없는 우유를 줬다. 하지만 결국 반으로 가져가면 아이들에게 알려지기 때문에 전혀 조사가 필요 없는 일이었다.



사진: Unsplash의Jonathan Borba




또 이 일은 내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날로 남겨진 날이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급식을 먹으러 가는 날이었다. 우리 학교는 급식실에 들어가기 전에 학생증을 바고트에 찍으면 이름과 같이 급식비를 지불했는 여부에 따라 알림이 울리는 시스템이었다. 그것도 엄청 크게 울렸기 때문에 뒤에 있는 학생들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날도 학생증을 찍고 지나가면 되는데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곤 했다. 한부모가정은 급식을 무상을 먹을 수 있었기에 괜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지만, 그날은 유독 비장한 표정의 급식실 선생님이 명단을 가지고 지키고 있었기에 더욱 심리적으로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차례가 오던 순간 불길한 예감은 정중했고, 듣기 싫은 알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사진: Unsplash의Fleur Kaan



급식실 선생님은 내 팔뚝을 잡으며 차게 식은 표정으로 명단을 보여줬다.

내 뒤에 학생들은 무슨 일인가 고개를 들어 이 상황을 보기 위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범죄에 걸린 수배자처럼 흐릿해진 시야로 명단을 봤다.



그곳에 보이는 내 이름과 옆에는 한부모 가정이란 표시가 체크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급식비 미납으로 밥 못 먹어'라고 단호하게 말했고,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알람 소리가 겹쳐지고 수치심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이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운동장을 지나가면서 서러움이 차올랐다. 



꼭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죄를 추궁받은 느낌이었다. 그 후 엄마께 전화를 했고, 행정실의 전산 오류였다는 사실과 학급 선생님께서 매우 미안해하셨지만 그때 받았던 충격은 나이가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생생하게 남아있다.



엄마가 점심시간에 사 온 떡볶이와 김밥을 매점에서 전산상의 오류로 급식을 못 먹었던 친구들이랑 나누어 먹으면서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서러움과 억울함을 느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이 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럴까?  내가 원해서가 아닌 타의로 의해서 밥을 못 먹게 되니 더 서러웠을 수도 있다. 당시 어른들의 실수와 무의미한 행동들이 돌멩이가 돼서 상처가 됐다.




사진: Unsplash의Afif Ramdhasuma





그래서 그 후 나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처음 기준이 된 것은 직장에서 100만 원도 되지 않은 월급이었기에 100만 원만 넘겨보자!라는 심정으로 일을 늘리기 시작했고, 또래 친구들이 취업해서 받는 첫 월급이 150만 원이라는 말에, 50만 원만 더 추가로 벌기 위해서 연구했다.



당시 2014년이면 150만 원으로 충분히 괜찮았지만, 현재의 물가상승을 고려한다면 현재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먹기 위해서는 최소 한 달에 얼마의 소득이 필요할까? 혼가정과 1인 가구 한 달 평균 생계비는 241만 원으로 확인됐다(뉴스참조) 



나의 성과는 항상 수익이다. 직장을 다니지 않기 때문에 직급과 성과제도를 경험해보지 않아서, 잘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수치가 수익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 연도에 150만 원을 벌었다면 내년에는 200만 원을 목표를 하는 식으로 내 연봉을 스스로 결정한다. 



사진: Unsplash의Jp Valery



다행히도 제로 창업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수익을 늘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시간, 노동력뿐이다.

이동하는데 드는 기름값과 강의에 필요한 소모품 구매를 제외하고는 큰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만약 오프라인으로 학원을 했다면 홍보, 공간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전기세, 월세 등 지출이 발생했겠지만 방과 후 수업은 수용 5%를 제외하고는 들어가는 비용은 없다.



온전히 내가 한 만큼 벌 수 있는 수익구조이다. 창업을 했지만 투자 비용은 3~5% 채 되지 않는다. 또 자신의 성향이 손실을 싫어하고 공격적인 투자보다 안전정인 투자를 원한다면 제로창업을 추천한다.

제로 창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앞서 글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고, 무엇을 잘 좋아하고, 잘하는지를 아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사진: Unsplash의Peggy Anke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다른 사람보다 더 깊고 정확할 수 것이다. 특히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라면 더욱더 그렇다. 취미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취미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고, 누구나 제로 창업을 통해 프리한 삶을 살 수 있다.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의 등장과 취미로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회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이제는 더욱 세분화된 타겟층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겼으며, 누구나 자신의 전문성과 좋아하는 것을 바탕으로 공유하면서 수익을 낼 수 있다. 



누구나 제로 창업을 통해 CEO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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