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못남은 결핍된 게 많아서
연애를 그만둔 이유요? 이제 지쳤거든요. 나는 정말로 지쳤어. 연애를 하면 에너지도 차고 기분도 신나고 삶의 활력소가 되지 않냐는 질문도 수없이 받았죠. 그래도 가볍게 연애를 하는 게 좋지 않냐는 말, 너무 많이 들었죠. 근데요. 있잖아요. 제 입장에서는 이제는 정말 결혼할 사람과 마지막 연애를 하고 싶거든요. 저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어요. 겪어보지 않은 무엇이요.
이 모든 것이 저는 여러 번 해본 거거든요. 물론 많은 결못남녀들이 수많은 연애를 반복하며 비슷한 처지에 놓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거예요. 딱히 자랑도 아니고 평범한 수준일 거예요. 모태솔로가 아닌 이상 삼십 대라면 하루 종일 가슴 설레고 미소가 지어지고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쏟아지는 그런 사랑과 연애를 몇 번쯤은 겪었을 거란 말이죠. 연애를 일부러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요. 저 같은 베타메일도 이 정도는 했단 말이에요.
그래요. 어쨌거나 저도 남산에 자물쇠 그만 좀 달고 싶고, 빌어먹을 자물쇠를 남산 관리인들이 한 번 대대적으로 철거하면서 그 여자친구들과 헤어진 게 아닌가 생각도 들고요. 이제는 첫 키스의 설렘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첫 키스를 할 때면 머릿속에는 이미 ‘이 여자와는 어떤 운명의 지랄 같은 방해도 없고, 지금의 사랑하는 감정과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지속되어서 우리가 결국은 딴딴따단 하면서 예식장 홀에 입장하고 아이는 잘 낳아서 영어 유치원 보낼 만큼 집안도 넉넉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그런 미래가 펼쳐질까’ 이것을 3초 만에 다 생각한단 말이죠. 진짜예요. 과연 이번에는 결혼할 수 있을까, 라는 뇌내망상 시뮬레이터를 순식간에 돌려보고 있단 말이에요.
저는 소개팅부터 사귀기까지의 단계를, 그리고 사귀기부터 결혼까지는 아닌 어떤 중간 지점까지의 단거리 경주를 수없이 반복했거든요. 정말이에요. 한 번은 어떤, 그래요 한 때 사랑했던, 그 여자에게 차 뒷자리에 준비한 꽃다발을 건네면서 사귀자고 했더니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하는 남자가 어딨냐고 펑펑 울었던 경험도 있단 말이에요. 아니 저는 이게 완벽하게 일부러 준비했다기보다는 하다 보니깐 이렇게 해야지, 지난 여자친구한테 혼나고 수정된 버전이, 다음 여자친구에게 다시 더 고쳐서 잘하게 되고, 또 모자랐던 버전을 고쳐서 업데이트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모으고 모아서 최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어가며 어쩌다 도달한 평범한 행위였던 것인데 말이죠. 그 여성 분은 이게 너무 감동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여성 분이 감동받은 모습에 제가 스스로 감동했냐고요? 아니요. 절대 아니요. 솔직히 저는 스스로 소름이 끼쳤습니다. 이건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무언가 나 자신이 반복에 미친 자동 응답 ARS 기계에 불과한 것도 같았단 말이에요. 이 빌어먹을 리세마라를 얼마나 해봤길래, 저는 그냥 평상시에 하고 다니던 말과 생각하던 이상적인 프러포즈와 반복했던 행동들이, 어떤 순수한 편에 가까운 여자에게는 ‘완벽한 고백’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 저는 이것이 정말 무언가 뒤틀린 남자, 오히려 무언가 잘못된 남자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아 정작 결혼이란 문턱은 넘지 못하고 수없이 반복하는 것에 천착하다 보면 이런 식으로 되는 건데, 이게 절대 자랑은 아닌 거다. 부끄러운 거다. 실패 전문가. 미완성을 끝없이 추구하는 남자, 그게 어쩌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죠.
저는요 반복을 수없이 반복했거든요.
퀘스트를 깨지 못 하는 남자.
도저히 달성되지 않는 인생의 임무.
결혼이라는 본 게임은 시작하지 못 하고, 사전 튜토리얼 테스트만 무한정으로 반복하는 남자, 그게 제 꼴이란 말이에요.
하하하하. 이게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웃기지 않을까요? 몇 년 전 어느 선자리에서 여자분한테 이런 얘기를 했거든요. 아니 정확히 이렇게는 아니고요. 결혼에 다다르지 못한 사랑의 실패를 여러 번 겪으면 마음이 점점 지쳐가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했었어요. 그랬더니 여자분이 아주 급정색을 하면서요. 결혼하지 못 했으면 실패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화를 내면서 묻는 거예요. 아니 그러면 결혼이라는 골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 사랑이 대단한 성공이라도 된다는 뜻인가요?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대꾸하거나 다투지 않았습니다. 결정사 매니저에게도 별다른 컴플레인을 걸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 뒤로 별 말도 없이 똥 씹은 표정으로 일관하길래 금방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요. 근데 그 여자분은 저에게 컴플레인을 넣었나 봐요. 자신의 연애 인생을 제가 부정했다고 느끼셨나 보죠. 아니, 그럼 사랑에 실패한 게 아니라는 잘난 분이 왜 결정사는 기웃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더라니까요?
이런 복잡한 상황에 관한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짜증이 나요. 지친다 지쳐 정말. 인생이 왜 이럴까요? 영화 <시네마 천국> 봤어요? 거기에 보면 어떤 병사가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100일 동안 발코니 아래에서 기다린 이야기가 나와요. 100일 밤낮을 발코니 아래에서 기다리면 공주가 병사에게 결혼해 주겠노라 했거든요. 그래서 병사는 오랜 시간을 기다렸어요. 탈진하고, 몸이 마비가 되면서 99일까지 기다린 병사가 하룻밤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든요. 돌아간 이유가 영화에는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99일을 기다렸음에도 사랑을 얻지 못 했다는 것, 굳이 100일을 반드시 채워야만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너무나 이상하고 지랄 맞은 거예요. 99일을 기다렸는데 왜 하룻밤을 더 못 채우겠어요? 기분의 문제거든요 이거는. 이 빌어먹을 세상이 나에게 퀘스트를 100번 도전하라고, 소개팅 선개팅을 100번을 채우라고 하는 것만 같단 말이죠. 아 물론 살면서 지금까지 소개팅 선개팅 도합 100번은 이미 넘게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 세상이란 놈이 재수 없게 나를 100이란 숫자를 세면서 테스트하는 것 같아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단 말이에요. 아마 병사는 이런 기분 아니었을까요. 100일을 반드시 채워야만 사랑해 줄 수 있다니, 이게 얼마나 가혹한 처사입니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벌에 쏘여도 기다렸다면, 그때 이미 사랑받을 자격이 있으니 결혼하자고 했어야죠. 99일간은 사랑하지 않다가 100일 째에는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서 갑자기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병사는 분명히 99일째 망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가면서 가래침을 퉤하고 뱉었을 겁니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공주 따위 필요 없다고…….
2023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