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류의 결투는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내정자가 있어 들러리로 참석했던 면접이 그랬고, 진급에 목마른 선배가 있던 팀에서의 내 고과평가가 그랬고, 첫 만남 중에도 몰래 데이팅앱을 돌리고 있던 여자와의 애프터 성사 여부가 그랬고, 경쟁력이 부족하여 선정 가능성이 희박했던 제안서 평가가 그랬을 것이다. 모든 일은 발 뻗을 곳을 확인부터 하고 누워야 하는 법이다. 결과를 기다리며 답답해 마지 않던 동료 직원이 왜 연락이 없는지 궁금하다며 내게 물었다.
“연락 없으면 그게 곧 대답이에요.” 나는 말했다.
그렇다. 대답 없는 것으로 일종의 대답이 된 것이다. 나는 이 명제를 무수한 소개팅과 선개팅, 만남과 이별의 반복을 통해 체득했다. 연락 없는 것이 연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반응도 반응이다. 예를 들어, 애프터 신청의 메세지를 ‘읽씹’ 당했다면, 그것은 어떤 메시지를 당신에게 전한 것이므로 분개할 필요 없다. 그러나 이 판단이 애매할 때가 있다.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우리 인생에는 예외가 있으니까 한번씩 기대하게 되는 것인데, 하지만 이 예외라는 것은 늘 안 좋은 쪽의 예외만 성립하고 좋은 쪽으로의 예외는 어지간해서 발생치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당신이 특별히 잘생겼든지 한 게 아니라면…….
“오늘 어떠셨어요?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첫 만남을 마치고 까치울역 전철 승강장. 그녀가 타야 하는 전철이 도착하기 5분 전, 나는 물었다.
앞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경우 즉답이 나오지 않으면 사실상 답이 된 것인데, 이날은 그녀의 망설이는 눈빛, 양 볼에 떠오른 홍조, 부끄러운 제스쳐 등으로 판단이 어려웠다. 만남의 분위기도 꽤나 좋았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으로 곧장 헤어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녀의 제안으로 근처 수목원에 가서 한참을 걷고 왔기 때문에 호감이 있는 상태로 생각했다.
“조금 생각해보고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일까지 알려주세요 그럼.” 어느 정도의 기한이 적당한지 모르겠으나 내일이 일요일이니까.
그리고 이어진 어색한 침묵의 시간. 이게 호감의 알콩달콩한 기운인지, 또는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의 침묵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모든 것이 내 희망사항에 불과했을 거다.
“전철 도착 30초 전에 물어볼 걸 그랬네요.” 머저리 같은 마무리 멘트로 그녀를 떠나보냈다.
사실 나는 첫 만남에서 대면으로 애프터를 신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애프터 만남이 성사될 만큼 서로를 원하는 관계였다면, ‘물어본다는 인식이 없을 정도’로 당일 현장에서 대화 중에 자연스레 다음 약속이 잡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물어본다는 형태’를 취한다면 그것은 포기하고 도박에 거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 나를 과연 어떻게 느꼈을까? 또 만나줄까? 에라 모르겠다 빨리 질러버리고 거절당하고 맘 편히 쉬련다.
그런데 어디서 듣기로 만남 중에 애프터 여부를 안 물어본다면 남자가 재는 것으로 느껴져 비호감이라는 여자의 심리를 접한 적이 있는데, 글쎄요. 이걸 잰다기보다는 조심스럽달까, 아니면 오히려 신사다운 행동이랄까, 그렇게 이해해주면 좋겠다! 어째서 신사다운 행동이냐고? 여자 입장에서 남자가 싫어도 면전에서 즉시 거절하기는 좀처럼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절하지 못 하는 성격이라서 집에 돌아가서야, 혹은 다음 날 아침에 비로소 “많이 고민했으나 인연이 아닌 것 같다”며 죄송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애프터 승낙을 번복하는 경우가 있다. 감정의 불필요한 쌍방 소모가 발생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상대방이 애프터를 거절하기에 편한 여건으로 만들어주는 친절한 사람이다.
헤어지고 묻는다면 거절 멘트가 예정된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는 거다. 이런 느낌 아니려나.
― 자 여기 공이 천천히 날아갈 건데 당신은 배트를 휘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혹시 수락을 예정하고 있다면야, 그건 그것대로 오케이 아닌가? 쥐고 있는 배트를 타이밍 맞춰 가볍게 휘둘러주면 되는 거다(그러면 남자는 그 순간부터 공을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지).
나는 그렇기에 헤어진 뒤의 이 질문에 승낙을 기대치 않는다. 이미 답은 정해진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무감으로 보내는 메시지다. 그러니 이 질문에 여자는 상대가 상처받을까 고민하며 단어의 조합을 애쓰지 않아도 그만이다. 우리의 표준 답변: “아쉽지만 인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를 보내거나 또는 아주 쉽게, 단순히 대답을 안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오히려 이런 사람과 불발됐으니 다행이라는 정신승리의 기회도 제공하는 셈이고, 여러모로 좋다. 남자 입장에서 질척거릴 여지가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상대방의 무응답에 화내지 않는다. 게다가 죄송하고 어쩌고 변명을 듣는다고 나의 비참함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므로. 반면에 무시당했다고 실제 나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기에 불쾌할 필요도 없다. 이 사람과는 인연이 아니라는 확인을 했다면 그만이다. 빠르게 다음 상대의 탐색으로 넘어갈 뿐. 삼십 대의 만남에서 이런 것 하나하나에 연연하고 따지고 상처받고, 주선자를 붙잡고 인간의 기본 예의에 대해 논한다거나, 혹은 인터넷에서 “이 여자의 심리는 무얼까요?”, “오늘 소개팅도 망했어요!”, “인연 찾기 참 힘드네요.” 이렇게 신세 한탄이나 구구절절 늘어놓다가는 어느새 곧 사십 대가 되고 말 거다. 이럴 시간이 없다!
그러니 상대의 무응답에 괘념치 말자. 사라지지 않는 숫자를 자꾸만 확인하지 말자. 즉답이 오지 않았다면, 다음 상대를 찾아 떠나야 한다. 대답 없는 것으로 당신은 이미 대답을 얻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