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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Oct 21. 2023

나를 드라이클리닝해 주세요.

결못남은 결핍된 게 많아서

  옷에 달린 세탁 라벨이 싫어서 뜯어내다 옷을 망친 적이 몇 번 있다. 몸에 닿는 감촉이 거슬려서 싫다. 게다가 대단한 설명을 적어둔 것도 아닌데 언어별로 한 다발을 박음질 해놨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이 옷은 반드시 손세탁하시오.

  이 옷은 반드시 드라이클리닝하시오.


  실제로 얼마나 예민한 옷인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야 소비자, 잘 들어. 이거 우리가 만든 옷이다. 이런 소재들 섞어서 만들었다. 사실 요즘 소재가 좋아서 웬만해선 망가질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책임지기 싫어서 까다로운 옷이라고 표기한다. 뜨겁게 빨지 말고 기계세탁 돌리지 말고 무조건 섬세하게 비싼 돈 들여서 고생해서 세탁해라. 우리 책임 아니다.


  요즘 나오는 옷일수록 이런 경향성이 더 해가는 것 같다. 문명은 발전하는데 어째서 더 취약하고 나약하고 까다로운 옷들이 시장에 나타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전부 손세탁하다가는 손목 나가겠다는 걱정부터, 비싸지도 않은 옷을 드라이클리닝 해야 한다면 차라리 몇 번 입고 새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고 만다.


  이런 믿을 수 없는 세탁 라벨과 비슷한 게 나라고 고백해야겠다. 어이없는 요즘 옷 같은 인간이 나란 말이다. 대단한 놈도 비싼 놈도 아닌 주제에 까다롭고 나약한 놈이다. 이에 관한 별도의 증명은 필요치 않다. 잊을만하면 엄마가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네 성격이 그러니까 결혼 못 했지!


  어쩌면 나도 이런 종류의 비겁한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런저런 약점이 있고, 어떻게 대해줘야 하고, 무엇을 거스르지 말아야 하고… 몸 어디에 네임펜으로 써두면 될까?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읽지 않고 물 온도 30도 지시사항을 무시하고 40도씨 기본값으로 돌려버리겠지. 내깟놈 맞춰 주느니 버리고 다음 옷을 새로 만나는 게 낫겠지.


  옷은 다행히 소모품이다. 버리면 그만이다. 소모품인 것은 옷뿐만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제외하면 모든 것을 소모품으로 여기고 살아야 속 편하다. 새로 산 휴대전화를 아스팔트 바닥에 모서리부터 전면까지 갈아버려서 자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내 몸과 마음만 신경 쓰며 살자고 생각한다. 문제는 소모품으로 대하지 말아야 하는 몸과 마음이 이상하단 거다. 내 몸이 원래부터 약하지는 않았는데,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개복치는 아니었는데, 나 자신의 순정품에서 멀고 멀어진 기분이다.


  면역 체계가 약해져서 몸이 낫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4개월째 다니고 있는 정형외과 진료 대기실에서 비타민D 주사에 관한 광고물을 보면서 하게 되었다. 비타민D 주사를 맞아보면 어떨까요, 의사 선생님? 적정치는 30~100인데 환자분의 혈중 농도는 25밖에 안 되네요. 비타민D를 경구 복용하거나 주사를 맞거나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의사 선생님, 저는 이미 비타민D를 매일 2,000유닛씩 먹고 1시간 넘게 걷는데 왜 이 모양일까요? 저런, 글쎄요, 일단 주사 맞읍시다.


  마음도 낫지 않는다. 나는 마음의 근육이나 회복탄력성 따위의 소리를 믿지 않는다. 20년간 아무렇지 않게 뛰어다닌 계단 길에서 넘어졌더니 그 뒤로는 공포심이 생긴다. 조마조마하며 가능하면 우회로를 택한다. 지난날의 반복된 실패는 과연 나를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회복력의 사나이로 만들었을까? 과거의 이별 극복 경험들이 새로 들이닥친 이별을 아무렇지 않게 내쫓도록 도와줬을까? 예고된 슬픔을 막아줄 마음의 방화벽이 세워졌을까? 허튼소리. 맞아본 기억이 떠오르면 더 겁나고 아픈 거다. 마음의 감정선들 중에서 몇 개가 노화하며 뚝뚝 끊어진 것이지, 무뎌진 것을 강해졌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나는 겁이 난다. 감정선도 몇 개 안 남았지만, 그마저도 취약한 겁쟁이 어른이 된 것이다. 나약하고 까다로운 내가 된 것이다. 그러니 나를 제발 드라이클리닝해 주세요. 울 샴푸 중성세제로 손세탁해 주세요. 부디 저를 그렇게 대해주세요. 부탁해요… 라고 붙이고 싶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이 모양이 된 나를 설명하고 다닐 일도 어차피 없다. 만약 자세히 설명하라는 요청이라도 받는다면, 나는 정작 자신의 취급 방법과 기분의 작동 방식을 명확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랬다저랬다의 멍청이라서 곤란할 것이다. 엉망진창인 신뢰 불가능한 세탁 라벨을 결국 내밀게 될 것이다.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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