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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Oct 12. 2023

이별보험이 있다면 나는 가입했을 거야

결못남은 반성할 게 많아서

  미안해 이런 식으로 연락해서.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오직 너에게 말할  있는 내용이거든.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어. <1973년의 핀볼>이라는 책인데, 모든 사물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한다더라. 나의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말이지, 나는 아직 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분명했거든. 우리의 관계가 아직도 소화되지 않았단 말이야. 그래서 힘들었던 거야. 그런데 어느   힘들었을까? 늘 존재하던 네가 내 곁에 없다는 걸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면 네가 존재하는 걸 알면서도 빈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이? 어떨까. 이제 와서 구분은 의미 없겠지.


  너를 잃은 가장 초기의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그때는 내가 대체 어떻게 버텼나 싶어. 툭하면 울었지. 술이 없으면 잠들  었어.  경험으로 나는 모든 종료에는 지연 장치 필요하다고 배웠. 특히 그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문제라면 말이지. 나에겐 분명 이별을 연습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관계의 갑작스러운 소실을 지연해 줄 안전장치가 필요했던 것 같아. 정말 힘들었지. 우리만의 취향, 우리만의 언어, 우리만의 뒤섞임, 우리가 이룩한 모든 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것을, 이게 더는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


  현대 사회에서는 돈만 낸다면 각종 위험과 사고로부터의 보장을 제공하는데, 어째서 사랑에 관한 안전장치는 없는 걸까? 사람을 가장 많이 파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인데 말이지. 만약에 이별보험이라는 게 있었다면 나는 반드시 가입했을 거야.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너를 잊는 동안 사람의 체취가 없는 외로움이었어. 밥 먹었니 오늘은 뭐 했니 따위의 사소한 대화가 사라진 일상이었어. 따뜻한 햇살 아래를 재잘대며 함께 거닐 맞잡은 온기가 없었던 거야. 사람이 간절히 필요한 거였어. 보상을 청구하면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는 서비스를 어떻게든 제공해 주는 거지. 어때, 괜찮지 않아? 약간의 애정이면 충분할지도 몰라. 나는 기꺼이 큰돈을 지불했을 거야. 그런 식으로 조금씩 마음의 재활을 도와주는 장치가 필요했단 말이야. 너를 서서히 줄여갈 수 있는 무엇 말이야. 타카토시와 에미가 마음을 단계적으로 정리할 나름의 시간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취향의 완벽한 A라는 가게의 햄버거가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째서 다른 가게에서 A 비슷하다는 B 햄버거를 굳이 먹어야 하냐고, 시트콤에서 쉘든이 페니에게 따졌던 내용 기억하지? 그래, 나도 마찬가지였어. 나는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와 비슷한 누군가를 찾으려 계속 애써온 거야. 너를 잃은 뒤로 지난 시간 동안 부단히 노력했다? 른 여자들을 만나고 연애도 했어. 소개팅은 수없이 했고, 결혼정보회사의 서비스도 이용했었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은 모든 여자들이, 너라는 존재를 감히 대체할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됐어. 이것을 반복해서 체험하고 증명한 셈이야. 내 인생 최대의 행운과 행복이 너였음을. 그리고 너를 잃고 나의 인생은 불행으로 국면이 전환됐음을 말이야.


  너를 잃고 나를 돌아볼 시간, 그리고 오롯이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 슬픔을 줄여주는 것, 혹은 고통을 오히려 구체화하는 것들에도 탐닉했었지. 테드 창의 단편 소설 <지옥은 신의 부재>를 보면, 지옥에 신체적인 형벌이 없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옥의 이미지가 있잖아? 뜨겁고 고통스럽고 악마들이 괴롭히고 이런 것들이 이곳 지옥에는 전혀 없어. 평화로운 곳을 어떻게 지옥이라고 부를 수 있냐고? 이유는 간단해. 이 지옥에는 신이 없어. 신이 관심 주지 않는 거야. 신으로부터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거야. 완벽한 존재로부터의 자애로운 사랑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는 사실에, 그러니까 A라는 햄버거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생 느낄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지옥의 수감자들은 무한의 고통을 느껴. 내가 그랬어. 나의 지옥은 너의 부재였던 거야. 그리고 나는 그런 지옥에서 살면서 99퍼센트의 여자를 찾으려 애쓰고 있어.  세상 어딘가에 네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분명히 알면서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부디 너라는 완벽이 존재했다는 것을 잊으면 좋겠다. 우리가 함께 했던 기억이 말끔히 소거됐으면 좋겠어. 내 머리가 하드디스크라면 포맷을 여러 번하고 바닷물에도 담갔을 거야. 컴퓨터 저장장치에 포맷 명령을 실행해도 데이터가 한 번에 지워지지는 않는대. 많은 데이터를 일부러 채웠다가 지웠다가 여러 번 반복하고 물리적으로 파괴해야 그나마 복원 불가능한 수준으로 소거된다더라. 나도 그러려고 다른 데이터, 그러니까 다른 무엇들을 잔뜩 찾아서 계속 채워봤는데, 너와의 기억이 오래도록 덮어쓰기가 되지 않았어. 무얼 해도 너의 형태가 내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거야. 아직도 가끔 너의 말투를 나도 모르게 따라 하는 모습을 발견하면 소름이 끼쳐. 더는 다른 방법 모르겠어. 그래서 남은 기억들을 순서대로 꺼내서 여기에 눌러 담고 있어. 너와의 종료를 지연해 왔던 속마음을 적어 놓고 가는 거야.


  이건 너에게 보내지 않을 메시지로 남을 거야. 그리고 출구가 되겠지.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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